신중재 /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 수필가
신중재 /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 수필가

운천 저수지의 벚꽃이 휘날리던 봄날이었다. 정들었던 화정마을을 떠나 원진빌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새 집은 아름답고 맘에 들었다. 정말 기뻤다. 그런데 곧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가 있으니 옥상에 방수처리가 안되어 비가 샐까 염려되었다. 방수작업 전문가를 찾기로 하였다. N상가에 다양한 종류의 페인트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장마를 미리 대비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주문이 밀렸다고 했다. 순번을 기다리려면 오래 걸리니 직접 칠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도색방법을 설명했다. 방수액과 페인트, 신나, 붓 등을 사왔다. 

작업복을 갈아입고 작업구상을 해 보았다. 그늘에서도 땀이 쏟아지고 살이 탈것 같은 무더운 여름 날씨에 경험도 없는 우리 부부 힘만으로는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줄 사람을 생각해 보니, 엊그제 반모임 월례회에서 날일을 하고 다닌다는 친구 권○○이 선뜻 떠올랐다. 그에게 급히 연락했으나 주일 아침이라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가까이 사는 처조카를 불렀다. 그 친구가 오기 전, 셋이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30여 평이 넘는 옥상의 초벌칠을 마쳤다. 하지를 넘긴 얄궂은 햇빛이 모자 틈을 파고들어 금방이라도 얼굴을 구워 버릴 것 같았다. 

친구가 내 이야기를 듣고 급히 달려왔다. 이리저리 일거리를 살피더니 내 의견도 무시하고 작업반장처럼 작업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옥상 위에 또 옥상이 있다며 승강기의 지붕 위로 오르겠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비가 새면 되겠는가? 자네 집인데 내가 소홀히 하겠어.”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원숭이처럼 벽을 타고 급히 올라가 페인트 통을 주문했다. 작업 도중 오금이 저려 오면서 조마조마하여 내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잠시 후, 작업을 끝내고 뛰어내리겠다는 것이다. 다칠 것이 뻔해 내가 완강히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젊었을 때는 2층에서도 뛰어내렸거든, 3m밖에 안 된디, 별놈의 꺽정을,” 장담을 시퍼렇게 하고 옥상 바닥으로 뛰어 내리고 말았다. 그러더니 순간, “아이고! 나 죽네”하면서 악을 쓰기 시작했다. “자네 이제 큰 탈 나뿌렀네, 으짠 당가, 이 사람아” 기가 막혔다. 손이 떨려 119가 잘 눌러지지 않는다. 구조원들이 들것을 들고 잽싸게 달려왔다. 들것에 고정하여 H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진단결과 발 뒤꿈치 뼈가 산산조각이 났고, 허리가 골절되어 12주 진단이 나왔다. 척추가 잘못되면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발바닥 뼛속에 쇠 넣는 수술을 세 번이나 하고, 허리에는 풍선 시술을 하여 천만다행으로 장애인 면은 하게 되었다. 나이 먹으니 치료가 더디고 고통을 심히 호소했다. 그럴 때마다 죄인이 된 나는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간병이 문제였다. 대소변을 가릴 수 없으니, 친구 아내도 없어 신앙을 가진 사촌 여동생이 일주일은 돌봐 주었다. 

나도 매일 병원에 들러 팔다리를 주무르며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처음에는 어찌되던지 빨리 났기를 기원했지만 날이 갈수록 진료비가 마음을 옭아맸다. ‘내가 불렀으니 당연히 진료비는 내가 내야 하지? 강력히 말렸지 않았느냐?’ 마음은 갈등했다. 퇴원할 무렵이 되니, 고민했던 진료비를 그가 말했다. 진료비가 생각보다 많이 나왔으나 친구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도 내 마음은 홀가분하지가 않았다. 얼마를 더 요양해야 할까? 앞으로 그의 몸 상태는 어떨까? 마음이 심란했다. 뒤탈이 없도록 합의서를 받고 싶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신안토니오라고 생각했는데, 자네도 어쩔 수 없이 신중재로구먼.” 

순수한 그의 신심을 헤아리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다. 가슴에 찍혀 있는 대못 하나는 빠진 것 같지만 남은 못이 몇 개나 더 될까? 그가 목발 내던지고 같이 미사하며 목청껏 성가 부르는 날 내 가슴에 박힌 못들은 모두 뽑힐까? 

그는 1년을 요양하다 퇴원하여 목발을 짚고 성당에 미사를 참례했다. 얼마 지나 그것마저 내 던지고 만났던 날, 그가 밝은 미소로 나를 대하며 악수를 청했다. 숨 막히는 암흑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남은 작업을 그와 완성하고 지난날을 되새겨 보고 싶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 후,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코로나19로 일손을 멈추고 가택연금 상태에 접어들어 지루했던 봄날, 철저한 옥상방수 작업계획을 세웠다. 이젠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겠다. 일주일 간격을 두고 하도에서 상도까지 정성껏 칠하고, 벽 페인트 작업까지 고운 회색으로 깔끔히 단장하고 나니 마음이 흐뭇했다. 

새롭게 단장한 옥상에서 평상을 펴놓고 아내의 생일파티를 열었다. 불빛 속의 옥상 자태는 새색시가 차려입은 색동옷처럼 아름답고 정을 듬뿍 담았다. 부부의 힘으로 이루었다는 자부심까지도 생겼다. 저만큼의 상무지구에서 네온사인의 불빛이 찬란히 비춰주고 있었다. 운천 호수의 해맑은 미소가 날아들고, 앞산 중앙공원 편백나무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며 우리 가족을 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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