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선

 영암읍 율산 출생
전 경기도교육청 
  교육국장-부교육감
전 경기도 의정부 교육장
전 경기교육장학재단 이사장
 

 

봄이 점점 깊어갑니다. 더위가 짙어지기 전에 산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겠지요.
나는 동행인(同行人)이 있으면 더 좋지만, 산은 혼자서도 훌쩍 떠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에 시간이 날 때면, 자주 산에 오릅니다. 지금쯤 내 고향 영암의 월출산(月出山)에도 제법 많은 분이 찾아오고 계시겠지요.

요즘에 산에 오르면 골짜기마다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진달래와 산벚나무들은 물론이고, 생강나무와 개나리 등이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바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장자(莊子)에는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觀水洗心), 꽃을 보며 마음을 곱게 하고(觀花美心), 산을 보며 마음을 활짝 열라(觀山開心)’고 하였습니다. 잠시 잠깐이지만, 그렇게 산속에 묻혀 세파에 찌든 마음을 깨끗이 씻고, 예쁘게 단장하고, 닫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봅니다. 

나는 산에 오르면 바위, 물, 산새 등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무가 있어서 좋습니다. 모든 산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게 바로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바위, 물, 산짐승 등을 감추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합니다. 새싹, 꽃, 녹음, 단풍, 열매, 낙엽, 등으로 사시사철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새들과 산짐승을 불러들이고, 곤충과 벌레 등 온갖 생명체들에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더욱이 나무는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결코 자리를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 찾아가도, 내일 찾아가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사이사이에 새가 머물고, 바람이 머물고, 물이 머물고, 그리고 온갖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머물다 갑니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그런 나무는 모든 것들이 머무를 수 있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지만, 떠나는 것들을 붙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는 머물다 떠난 것들의 그 모든 사연을 ‘나이테’에 곱게 새겨 간직합니다.

그래서인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대저 사람이 산을 오르면 산의 높음을 배워야 하고, 나무를 바라보면 나무의 푸름을 배워야 하고, 시냇물을 보면 그 시냇물의 맑음을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시습이 누구입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저자이자,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산천을 유람하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산천을 유람하며 남긴 말입니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배워야 합니다. 

오늘 나는 집 근처 산에 오를 예정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미세먼지가 많을 거라네요. 나무는 그 미세먼지까지도 품으며, 오늘도 수많은 사연을 만나고 나이테에 깊숙이 기록하겠지요. 오늘도 산과 나무에게서 배웁니다. 하물며, 만나는 사람 모두는 우리의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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