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 서호면 몽해리/전 목포시 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이기홍 / 서호면 몽해리/전 목포시 교육장 /전 전남교육청 장학관

오래전 아시내에는 거의 집집마다 은행나무가 한두 그루씩은 있었다. 유실수 장려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시내에서 나고 자라 나라의 인물이 된 분이 기념으로 은행나무를 주면서 집집마다 심기를 권장했기 때문이다. 아시내 사람들은 출세한 분이 주신 귀한 나무라 생각해 집안에 공터가 있는 집은 거의 한두 그루씩 심었다. 그래 상당기간 아시내는 은행도 따고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으로 운치도 있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누군가 집안에 은행나무가 있으면 자식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긴다는 말이 퍼지면서부터 한 집 두 집 은행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마을 회관에 가면 누구 집은 오늘 은행나무를 베어냈고 누구 집은 내일 멀리 사는 사위가 와 베어낸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도 어머니가 회관에 다녀오면 내게 은행나무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웃어넘기며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렸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에는 아내가 자꾸 은행나무를 베어내야 된다며 나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은 나무가 잎을 내 자라고 있으니 낙엽이 지면 생각해보자며 시간을 끌어왔다. 그러다 최근 아들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아내의 채근은 더 심해졌고 나 역시 점점 버틸 힘이 소진되어가고 있다. 사실 아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시내에 그 많던 은행나무가 우리 집에 있는 은행나무 외에는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아 입장이 곤란해졌다. 재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대산댁 텃밭에 한 그루가 남아있어 버틸 힘이 있었는데 올해는 정말이지 난처해지고 있다. 다른 것은 다 외면 할 수 있겠는데 아들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점은 무척 부담이 된다. 

나는 은퇴 후 봉사 차원에서 지금껏 마을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 몇 달 전에는 그네를 달게 됐다. 아시내에 은행나무를 주었던 분의 자제분이 작년 여름, 마을 일에 쓰라고 300만원을 희사해 주어 그 돈으로 나무를 심고 수족관을 설치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설을 기해 찾아올 아시내 손자 손녀들을 위해 그네를 매달게 된 것이다. 뒷동산 소나무에도 달고, 당산나무인 팽나무에도 달고, 해질녘이면 천황봉을 오래도록 봐라봤던 회산댁이 떠나간 집 느티나무에도 달았다. 그리고 어린아이들도 탈 수 있게 마을 운동기구 비가림 시설에도 세 개를 달았다. 그러다 아시내에 겨우 한 그루 남은 우리 집 은행나무에도 성인용으로 그야말로 덤으로 달게 됐다. 그러자 아내가 그걸 타보고 신기하게도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 참으로 좋다고 했다. 그리고 거의 매일 한 번씩 타는 것이었다. 

이상한 점은 그네를 탄 이후로는 정확히 음력으로 작년 섣달부터 금년 봄인 윤이월 지금까지 은행나무를 베어내라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다. 조금만 더 버티며 잎사귀가 파랗게 나올 것이고 그러면 다시 낙엽이 질 때까지는 베어낼 수 없을 것이니 설을 기해 찾아올 손자손녀를 위해 매단 그네가 우연히 은행나무를 살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들 문제가 잘 풀려야 은행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데, 간밤에 걸려온 아들 전화 목소리로 봐서는 아직은 쾌활하지 못해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45여 년 전, 교직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작은 학교의 체육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개발도상국인 나라 형편으로 전반적으로 학교 사정이 어려웠지만 특히 내가 근무한 시골의 작은 학교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운동기구는 기본도 갖춰지지 못했고 있는 운동기구마저 망가져 사용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때 업무를 맡자마자 학교의 협조도 받지 않고 그네 한 개를 달아놓은 적이 있었다. 그네를 달아놓자 쉬는 시간이면 그네 앞은 말 그대로 장사진을 이뤘다. 

아이들은 스스로 몇 번 오가면 내려오기로 규칙을 정해 놓고 그네를 윤번제로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상당 기간 지속됐다. 더 이상 나머지 망가진 그네도 그대로 놔둘 수 없어 시간만 낭비하는 행정절차를 무시하고 서둘러 사비를 들여 그네를 달아 버렸다. 그 일로 교장 선생님에게는 눈총을 받았는데, 결제도 받지 않고 학교일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 마을 아시내 일곱 군데에 그네를 달면서 나는 반세기 전의 일이 생각났다. 

오늘은 주말을 기해 찾아온 해남댁 사위와 외손자들이 내가 매어놓은 그네를 재미있어하며 탔다. 나는 우리 집 은행나무 그네에 앉아 오랜만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것저것을 생각했다. 반세기 전의 시골학교 운동장, 그 많던 아시내 은행나무, 고인이 된 은행나무 기증 어르신, 그리고 성금을 준 기증인 아들과 힘들어하는 내 아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그네가 매달린 홀로 남은 우리 집 은행나무를 자세히 보니 은행나무 가지에서 새싹이 틀려는지 돌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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