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연 /  사회복지학 박사 / 영암문화포럼 상임대표 / 한국청소년인권센터 이사장
강병연 /  사회복지학 박사 / 영암문화포럼 상임대표 / 한국청소년인권센터 이사장

국사봉은 영암군과 화순군, 장흥군에 속해있는 614고지의 봉우리에 산림이 울창하고 산세가 험할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지리산 줄기와 화순 화학산에서 연결되어 영암·강진·장흥 등으로 통하는 주요 통로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항일전쟁과 6.25사변 당시 치열한 전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안타까운 현실의 생생한 역사의 자락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말 최초의 여성의병 양방매는 1980년 금정면 청룡리에서 선비 양덕관의 4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선비 집안의 영향으로 성품이 곧고 말수가 적었다.

양방매와 강무경의 첫 인연은 1908년 7월에 있었던 사촌(금정면 청룡리 동산) 전투가 그 계기다. 나주 다도면 판촌마을에 주둔하며 노두구 전투를 마치고 다음 항쟁을 위해 영암으로 행군하여 사촌에 이르렀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일본 헌병대장 금평산이 기병 20기를 거느리고 온다는 연락을 받은 의병장 강무경은 의병들을 사촌마을 돌담에다 매복시켜 놓은 다음, 후군에게 포를 터트리며 적을 일제히 공격하여 적장 금평산과 기병 10여 명을 사살했고 적군의 무기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승전의 기쁨 속에 가까운 양덕관 선비의 집에서 강무경은 유숙을 하게 되어 30살 강무경과 18살 양방매가 인연으로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8년 9월, 장흥 유치 신풍에서 전투를 마친 강무경은 피곤이 엄습해 오면서 온몸에 열이 나고 힘든 상황에서 분토의 양 선비집을 찾아 몸져눕게 되었다. 몇 달 전 알게 된 양방매는 30대의 청년 의병장 강무경을 마음속으로 연모하던 터라 강 의병장을 정성스레 간병을 하였고 결국 서로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이 사실을 눈치 챈 아버지 양 선비와 오빠 양성일은 남녀가 유별한 시절이라 두 사람의 혼례를 서둘러 이틀만에 혼례를 올리게 하였으니 그때가 1908년 9월 22일이다.

신혼의 단꿈도 순식간, 지극정성의 간병으로 5개월 만에 몸을 추스린 강무경 의병장은 전쟁터에 출전하려 집을 나서야 했다. 따라나서는 양방매에게 강무경은 "여자가 나설데가 아니다."며 적극 말렸으나 나라 위해 목숨 바치려는 남편에게 언제 어떤 일이 있을 줄 모르니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라며 단호히 의병투쟁의 길로 함께 나섰다.

그러나 순종의 '의병해산칙령'에 의해 7월 21일 금정면 청룡리 고인동에서 피눈물로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심남일 부부와 강무경·양방매 부부도 화순 능주 풍치 바윗골에서 밀고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때가 1909년 10월 9일이다. 일제는 심남일·강무경 의병장을 체포한 후 일본군 토벌대를 해체했으니 한말 의병사에서 이들의 위치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리라.

심남일과 강무경·양방매는 광주경찰서로 이송 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양방매는 나이가 어린데다 평소 말수가 적어 심문할 때 묵비권을 행사하여 벙어리로 간주해 훈방되었으나 남편 강무경은 1910년 7월 23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으니 그의 나이 32세요. 양방매는 20세였다.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 양방매는 친정으로 돌아와 전사한 오빠 양성일이 낳은 조카를 키우면서 국사봉 일원을 누비며 남편의 영혼을 달래는 일이 주 일과였으며 약초 캐기와 품팔이로 연명해야 했다. 양방매는 남의 집 품팔이를 가서 새참이나 식사할 때는 꼭 자기의 몽당수저를 품속에 지니고 다니면서 그 수저 만으로 식사를 했으며 일체 남정네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62년 3월 강무경 의병장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고 국립묘지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양방매의 나이 94세인 1984년 6월 6일 70년 만에야 남편의 묘역을 눈물로 참배했다. 2년 후 1986년 9월, 96세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국가에서는 1995년에서야 국립묘지 현충원의 강무경 의병장과 합장을 해주었고 2005년 한말 최초의 여성의병으로 그 공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건국포상을 추서했다.

의병장 강무경은 무주군 설천면 출신으로 국사봉을 본부로 정한 '호남의소' 총대장 심남일 휘하의 가장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선봉장으로 국사봉 접경지에서 23회의 전투를 치른 심남일 장군이 가장 신임한 의병장이었다. 

필자는 진주강씨 광주·전남종회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평소에 선조들의 유업에서 전남전투에 참여한 강무경 의병장을 찾게 되었다. 또 그의 부인 의병 양방매 여사가 국사봉 자락에서 약초와 나물로 연명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던 그 업적과 흔적을 기리기 위하여 ‘의병 양방매 치유축제’를 국사봉 최상단에 위치한 신유토마을에서 개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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