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배 / ​​​​덕진면 노송리 출생 / 전 초등학교장 / 전 EBS 교육방송교재 집필위원 / ​​​​수원지방법원 조정위원
신용배 / ​​​​덕진면 노송리 출생 / 전 초등학교장 / 전 EBS 교육방송교재 집필위원 / ​​​​수원지방법원 조정위원

얼마 전 할머니 산소에 성묘하고 가는 길에 금정으로 넘어가는 여운재(일명 영운재)를 지났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점철된 질곡 중 하나인, 나무하던 그리움을 가슴으로 보고 싶어서다. 옛날 농촌에서의 유일한 난방은 잡목이나 낙엽들이 전부가 아니던가. 할머니가 나무하시는 구역은 영암에서 금정으로 가는 여운재를 지나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 국사봉의 중턱 쯤인데, 집에서 이곳까지는 빨리 걸어도 두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당시 나무 철이면 학교에서 오자마자 산으로 가야만 했고, 여운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국사봉으로 오르는 샛길로 접어드는 삼거리에 큰 바위 하나가 있었다. 

나는 전부터 명절이나 제사 때 산소에 가는 길이면 으레 금정에서 영암으로 넘어오는 지방도로를 택한다. 예의 그 바위가 있는 부근에 이르기도 전에 벌써부터 가슴이 찡해온다. 그럴라치면 함께 간 아내가 먼저 눈치를 챈다. “당신 또 할머니랑 나무하던 얘기 하려고 그러제?” 이미 촉촉이 젖어버린 내 눈가를 쳐다보며 핀잔 반 놀림 반 한다. 그 바위는 할머니와 나만의 약속의 바위였다. 손자 녀석 학교 끝나고 올 때쯤이면 나무 한 둥치를 그 바위 위에 올려놓으셨고, 난 할머니의 땀 냄새가 밴 나무 둥치를 지게에 져 나르곤 했다. 일요일에는 예외 없이 국사봉의 할머니 나뭇갓까지 함께 올라가 베어 말려놓으신 나무들을 오전과 오후로 하루 두 차례 운반했다. 좁고 가파르며 게다가 구불거려서 발을 옮길 적마다 후들거리고 몸 전체로 전해오는 나무의 무게와 어깨를 짓누르는 지게 끈의 압박은 가중되는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이때 두 발통을 양손으로 힘껏 들어 올리면서 내려올 때면, 손과 얼굴은 물론 온몸에서 흐르는 땀을 어쩌지 못해 마냥 눈꺼풀을 끔벅거리며 흘려버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어쩌다 얼굴 위로 살살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뼛속까지 시원하고 상쾌했던 추억도 아련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일요일이어서 오후에 두 번째 나무를 운반하는 날인데 그날따라 힘이 많이 부쳤던가 보다. 나는 비좁은 비탈길을 내려오다 그만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야 말았다. 문제는 나 혼자가 아닌 바로 앞서가시던 할머니의 등을 덮친 것이다. 우린 거의 동시에 앞으로 꼬꾸라지고 이고 진 두 덩치의 나무는 아주 빠른 속도로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기뻤다. “오늘은 가볍게 갈 수 있겠구나.” 여기저기에 둥치에서 빠져나온 나무들이 흩어져 있었건만, 저 아래 작아진 나뭇단만 지고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본체만체 내려갔다. 굴러가던 나무 둥치가 한참 후에야 멈추었다. 나무들이 많이 빠져나가고 단단히 묶었던 새끼줄마저 훌렁해져 얼핏 보아도 훨씬 작아져 있었다. 다시 새끼줄을 풀어 묶으려다 말고 문득 할머니가 안 보인다고 생각했다. 평상시에도 할머니는 고된 농사일로 한쪽 다리가 조금 불편하셨기 때문에 그냥 저만치 뒤처져서 오시나 보다 생각하며, 산 위를 쳐다보니 저 높은 곳에서 허리를 구부리면서 연신 무엇인가를 줍고 계시지 않는가? 자세히 보니 나무 뭉치가 굴러 내려오면서 빠져 버린 그 나무들을 하나하나 모두 주워서 치마에 담으시고 그게 모이면 다시 칡덩굴로 묶고 계셨다. “할머니! 그냥 내려와” 몇 번이나 소리를 쳤지만, 할머니는 못 들은 체하셨다. 할 수 없이 산 위로 다시 올라가야만 했다. “할머니! 그냥 가자니깐” 주워 모은 나무를 합하여 다시 지고 갈 일이 너무 싫었다. 나의 퉁명스러운 외침에도 아무 말씀 없이 다시 주운 나무들을 묶고 계시는 할머니는 자꾸만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회피하셨다. 

그런데 나는 보았다. 그 어떤 역경과 고난의 길에서도 쉽사리 절망하시거나 낙담 한마디 없으시던 당신의 눈에 그렁그렁 닭똥 같은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가득 고여 있는 게 말이다. 급기야는 더 이상 참지를 못하시고 고여서 넘친 눈물들이 주르륵 할머니의 볼을 타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할머니의 바로 코앞에서 뚜렷하게 보았다. 할머니와 함께하는 오랜 세월 동안에 처음으로 본 할머니의 눈물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할머니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 통정대부를 지낸 천석꾼 집안에 며느리로 시집와 한때는 십여 명이 넘는 일꾼들을 거느리던 호시절도 잠시, 웬수 놈의 한국동란으로 하나뿐인 아들과 재산마저 하루아침에 이슬처럼 흩날리고, 그러하고서도 손자만은 잘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지금껏 모진 비바람에도 결코 굴하지 아니한 할머니셨다. 그런데 이제 당신 앞에는 그토록 애써 베고 말려온 나무들을 하나둘 다시 주어 모아야 하는 실로 하찮은 처지와 현실 앞에서, 지나온 세월 속에 숙명 같은 당신의 삶이 얼마나 애달고 서글프셨을까? 내가 어른이 되어서야, 아니 그보다 더 오랜 후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그때 그 할머니의 눈 안 가득하던 눈물 방울방울이 회한의 응어리로 가슴에 와 맺힌다. 참으로 어리석고 못난 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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