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47] 국립 마한역사문화센터 건립과 마한의 정체성

시종 태간리 자라봉 고분 / 마한은 세력 크기 여하에 따라 대국·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영암에는 반남·시종을 아우르는 대국 내비리국과 영암읍 쪽에 소국 일난국이 있었다. 많은 유물유적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시종 태간리 자라봉 고분 / 마한은 세력 크기 여하에 따라 대국·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영암에는 반남·시종을 아우르는 대국 내비리국과 영암읍 쪽에 소국 일난국이 있었다. 많은 유물유적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3월 30일 대한민국 대표축제인 왕인문화축제가 4일 동안 왕인박사유적지에서 열린다. 코로나 19로 인해 중단된 지 4년 만에 열린다. 이번 축제의 주제도 ‘K-레전드, 왕인의 귀환’이다. 왕인은 기원 후 400년 무렵 일본에 건너왔다고 일본 역사서에 나와 있다. 곧 왕인은 마한 시대 인물이다. 10년 넘게 연구한 왕인박사 연구업적을 모아 최근 출간된 ‘왕인박사’는 이러한 사실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도 왕인을 마한인으로 보는 데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다. ‘백제의 왕인’ 이미지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는 까닭이다. 마치 한국 고대사의 원류인 마한을 아직도 변방 역사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무쪼록 이번 행사가 단순한 축제를 넘어 왕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는 곧 영암 마한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센터 건립은 역사균형 발전

오늘은 마한의 역사적 위상 제고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업의 하나인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 건립과 관련된 얘기를 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미 본란을 통해 국립 마한역사문화센터 건립과 관하여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고, 본보 또한 사설을 통해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이제 국립마한센터 건립 타당성 용역이 발주되는 등 관련 정부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에 국립 마한역사문화센터 건립과 관련하여 이미 본란을 통해 얘기한 국립 마한역사문화센터 건립이 왜 필요한가 하는 얘기를 하고자 한다. 

전라남도가 지난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21년, 대선공약 1호로 내세웠던 ‘국립마한센터(이하 센터)건립’ 사업이 올해 타당성 용역을 시작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필자는 센터 건립을 대선공약으로 정할 때 자문회의에 참여하였고, 이후 문화재청 고위관계자를 두 차례나 만나 센터의 전남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선이 끝난 2022년 4월에는 대통령 인수위 고위관계자를 만나 국립가야문화센터가 착공되었으므로 센터 건립은 지역균형 발전론에서 필요함을 강조한 바 있다. 동시에 마한사에서 파생된 가야사에 비해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마한사를 역사균형 발전 측면에서도 센터 건립이 필요함을 설명하여 깊은 공감을 얻었다. 곧 센터 건립은 지역균형 발전을 넘어 역사균형 발전의 상징적 의미임을 강조하였다. 대선공약 건의에 센터 건립을 포함한 전라남도는 센터 건립 문제를 치밀하면서도 마한사의 위상을 확립해야 한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추진하였다. 전남도 공무원들은 앞서 ‘마한특별법’ 제정 당시에도 정말 혼신을 기울여 쉽지 않은 결과를 얻어 냈다. 이들의 공적을 기억해야 함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곤 한다. 영암군과 영암군민 또한 특별법 제정과 센터 건립과 관련하여 어느 지자체보다 앞서 뛰었다. 마한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전남도민의 간절한 염원이 센터 건립 타당성 예산 2억이 올해 국비에 반영하는 성과로 나타났다.

마한의 중심지는 영암

센터 건립에 여느 마한 연구자보다 애정을 쏟았고, 5년 넘게 마한 글을 신문 등에 연재하여 최근 고양되고 있는 마한사 붐 조성에 나름의 역할을 한 필자는, 국립마한센터 타당성 용역이 발주되는 것을 보며 몇 가지 당부를 하고자 한다. 우선 센터 건립이 속도감 있게 추진되어 현 대통령이 준공 테이프를 끊기를 바란다. 센터 건립에는 지역과 역사균형의 상징성이 들어 있다. 균형 발전을 강조한 현 정부의 가장 중요한 치적이기 때문이다. 이전 정부 때 추진계획을 수립해놓고 희망 고문하다 착공조차 되지 않았던 국립 심혈관센터는 반면교사이다.  

현재 전남 마한유적이 분포한 지역에서는 각기 국립 마한역사문화센터를 유치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필자는 위치도 중요하지만, 국립마한센터의 기능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센터 건립의 배경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마한 역사는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중·남부를 관통하는 역사였다. 변한·진한이 마한에서 갈라졌고, 이들의 왕을 마한 출신이 하였다는 사실과 백제도 마한 땅에서 출범했다. 마한이 한국 고대사의 원형이었다. 그런데도 마한 역사는 삼국 중심의 역사에서, 최근에는 가야까지 포함된 4국 중심의 역사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마한사가 한국사의 중심으로 부각할수록 기존의 역사 인식에서 형성된 사관이 일거에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의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억측해 본다.  

1917년 나주 신촌리 9호분을 발굴하다 마한의 독자성이 담보된 금동관이 드러나자 당황한 식민사학자들은 이를 숨긴 채 백제사 일부로 마한사를 축소 왜곡하는 데 급급하였다. 7세기 중국 기록에, 백제가 마한 땅에서 건국하였다느니, 마한 역사를 계승하였다느니 하는 표현이 자주 보인다. 그렇지만 백제가 마한을 병합했다는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마한은 세력 크기 여하에 따라 대국·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영암에는 반남·시종을 아우르는 대국 내비리국과 영암읍 쪽에 소국 일난국이 있었다. 이렇게 영암에는 대국, 소국의 두 국가가 있을 정도로 마한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 외에도 나주 복암리, 해남반도 등에도 마한 대국이 있었다. 거대한고분 출토 유물은 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한을 우리 스스로 ’대국‘이라 부르지 못하고 ‘소국’이라고 부르는 데 앞장서고 있다. 마한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이른바 마한 연구자들은 여전히 마한 문명을 건설한 마한 대국을 ‘마한 소국’ 운운하며, ‘대국’을 이야기하며 800년 넘는 마한사를 일관된 흐름으로 파악하고 있는 필자를, 마한의 ‘문외한’으로 비난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진실을 말한다. 

마한사의 인식 제대로 가져야

교과서에서 마한사 서술은 참담할 정도로 축소되었다. 사람들은 교과서에서 전(前) 근대사 비중이 줄어 마한사 서술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른바 우리 지역 마한 전문가조차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가야사 관련 서술이 전 근대사 서술 분량이 줄어들었음에도 오히려 늘어나 있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이 지역에서 30년 동안 마한연구가 이루어졌고, 마한연구를 주도하는 국립연구기관이 있음에도 왜 이처럼 마한 서술이 축소되었는지 냉정히 반성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국립연구기관의 산하기관으로 설립되려는 센터의 미래에 대해 크게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별도의 법인설립이 가장 이상적이라 여기고 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된 마한 정체성은 10세기 초 후삼국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한의 정체성은, 영산강을 중심으로 중국, 왜, 가야, 베트남 등 주변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융합되어 형성되었다. 영산강은 동아시아 문화의 허브(Herb)였다. 영산강을 중심으로 주변국과 교역을 통해 마한 문화가 꽃피웠기 때문에 ‘해상강국 마한’이라는 용어를 전남도는 내걸고 있다. 

마한특별법에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라는 공간 범위가 들어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영산강 유역이 마한 역사의 중심지이자 발상지였다. 이곳에서 수백 년 동안 정체성을 형성하며 발전해왔기에 백제와 통합 이후에도, 후삼국기에도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전라도 정체성의 토대가 되었다. 센터에는 이러한 마한의 역사성과 공간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센터가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존립 근거는 상실된다. 센터 건립 장소 선정에 고려할 가장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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