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마애여래좌상  / 월출산 아래 자리한 구림의 상대포나 시종의 남해포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진 해양활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바다에 대한 신앙을 갖게 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모습이 월출산의 관음신앙으로 나타났다.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 월출산 아래 자리한 구림의 상대포나 시종의 남해포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진 해양활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바다에 대한 신앙을 갖게 하였으며 그 구체적인 모습이 월출산의 관음신앙으로 나타났다. 

 

메이지 시대, 토요도미 히데요시

필자는 최근 광복회 전남도지부의 ‘국외 항일유적지 탐방단’의 해설 강사로 일본을 다녀왔다. 우리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오사카 지역은 마하 시기에 도래인들이 이주하여 개발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일본에 건너간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집단촌을 형성하며 지낸 곳이 오사카 지역이다. 오사카, 나라에는 고대 마한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번 답사에서 필자가 새롭게 확인한 역사적 사실이 있어 잠깐 소개한다. 

오사카성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주한 곳이다. 현재 성의 일부인 천수각이 복원되어 많은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천수각 들어가는 곳에 태평양전쟁 때 일본 육군 제4사단 사령부가 주둔한 사실을 입증하는 건물이 역사기념물로 보존되어 있어 군국주의에 광분한 일본군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4사단 사령부 맞은편 공원에 메이지 국왕이 방문한 사실을 입증하는 팻말이 있다. 유구 제국을 차지하여 오키나와로 편입하고, 홋카이도를 역시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정한론을 내세운 메이지 국왕과 일본 천하를 통일하고 대륙 진출의 꿈을 꾸었던 토요도미 히데요시가 오버랩 되었다. 곧 메이지 국왕은 토요도미 히데요시를 통해 그의 꿈을 대내외에 과시하려 하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은 독자들이 잘 아는 ‘귀무덤’을 답사하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귀무덤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이 그들의 전공을 과시하고자 쌓은 봉분이다. 그 봉분 옆에 역시 메이지 국왕의 방문을 입증하는 팻말(御馬를 매둔 곳)이 있었다. 이 귀무덤 역시 토요도미 히데요시와 관계가 있다. 결국 메이지 시대에는 토요도미 히데요시를 역사의 모델로 삼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림 상대포의 지리적 여건

지난 12월 1일 영암군의 후원으로 ‘해양제사 유적과 월출산’을 주제로 ‘2022 마한학술 세미나’가 기찬랜드 트로트가요센터에서 열렸다. 필자가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를 이처럼 설정한 까닭은 월출산이 영산 지중해를 통해 중국, 왜, 가야, 동남아 국가 등을 왕래하는 많은 선박들의 무사항해를 해신(海神)에 기원하는 신앙처(信仰處)라는 사실을 규명하고, 나아가 마한의 대표적 국제항구인 남해포에 세워져 있는 해신을 모시는 신당과 상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다. 물론 마한 시대에 그곳에 있는 신당 명칭이 ‘남해신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당이 있었던 곳에 해신당이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논문들은 세미나의 주제처럼 월출산과 남해신사를 연결하는 곳에 해양신앙이 존재해 있었음을 한결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중앙대 송화섭 교수의 ‘영암 월출산의 관음신앙 연구’라는 주제는 영암지역에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해양신앙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필자 역시 본란을 통해 월출산에 관음신앙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지만, 이번 송 교수의 글을 통해 구체적인 사례를 확인하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특히 세미나 다음 날, 영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의 마한길 답사에도 동행하여 남해신사의 역사성을 직접 현장에서 설명해주어 무척 고맙게 여긴다. 오늘은 송 교수의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가 이미 ‘영산 지중해’라는 표현을 쓴 바 있지만, 송 교수는 영암군의 지형이 서해 바다를 향하여 돌출된 반도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영암반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고 하였다. 영암교육지원청 교육장 집무실에 걸려 있는 영암군 지도를 보면 대양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거북의 모양은 ‘반도’라는 표현이 적절함을 말해 준다. 일찍이 남해만이라 부르는 영산 지중해의 남쪽으로 들어오면 상대포와 덕진포·남해포에 이르고, 북쪽으로 이르면 회진포와 영산포로 올라간다. 송 교수는 구림 상대포는 월출산 남쪽 안쪽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항지, 피항지로서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국가 신앙처였던 월출산 

송 교수는 먼저 월출산에서 산신에 제사를 지내는 사실이 문헌과 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소사(小祀)로 편재된 월출산은 통일신라 시대에 국가 신앙처였다. 지금도 월출산 정상에 ‘소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표지석이 우뚝 서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35권 영암군 단묘에 월출산단(月出山壇)이 월나악에 있다고 하여 월출산이 월나악임을 밝혀놓았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제35권 영암군 사묘조에도 월출산에 월출산신사(月出山神祠)가 있음을 밝혀놓았다. 월출산의 소사는 고려시대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1018년 현종 9년에 전국의 지방 제도를 개편하면서 산천신에게 작호가 내려졌다. 월출산에도 작호가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월출산 천황봉의 제사유적으로 밝혀졌다.

월출산 천황봉 제사유적에서는 11〜12세기 청자 편, 녹청자 편이 집중 출토되었다. 청자류는 대접, 병, 완, 향로 등이 중심이며, 13〜14기경 상감청자도 대접, 접시, 잔, 매병, 마상배 등이 출토되었다. 11세기경 천황봉에는 월출산신사(月出山神祠) 사당이 건립되어 있었으며, 월출산신사에서 청자 제기로 제물을 진설하고, 토제마를 월출산신에게 봉헌하고 산신제(山神祭)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월출산의 소사는 조선 건국 이후에는 사전(祀典)에서 제외되어 본읍치제(本邑致祭)로 전락한다. 본읍치제라 국가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게 아니라 군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는 방식이다. 천황봉 제사유적에서 17〜18세기 조선백자가 소량 출토하지만, 월출산 산신제의 전성기는 11〜13세기 고려중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월출산에 관음신앙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도갑사의 관세음보살 32응신도와 강진 무위사의 후불벽리 백의관음보살도를 통해 월출산에 관음신앙이 뿌리내려져 있음을 주목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제35권 영암군 산천에 있는 관음굴 이야기는 월출산의 관음신앙 존재를 명확히 해주고 있다. 

“華嚴祖師 湘公이 터를 잡고 지은 곳이다. 그 암자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비로소 붙어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한 곳이요,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美黃寺)․통교사(通敎寺)가 있고 북쪽에는 문수암(文殊庵)․관음굴(觀音窟)이 있는데 그 상쾌하고 아름다움이 참으로 속세의 경치가 아니다. 또 수정굴(水精窟)이 있는데, 수정이 나온다. 지원(至元) 신사년(辛巳年) 겨울에 남송 큰 배가 표류해와 이 산의 고관이 산을 가리키며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하였다. 그 고관은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상주(常住)할 땅이다.” 

관음굴을 통해 월출산에 관음신앙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단, 지금까지 관음굴이라고 믿어지는 동굴이 확인되지 않아 관음불이 머물러 있는 곳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송 교수는 말한다. 그런데  

“(도갑사) 월출산에 있다. 도선이 일찍이 머물렀던 곳이다. 비석이 있는데 글씨가 읽을 수가 없다. 절 아래 동구에 두 개의 입석이 있는데, 하나에는 ‘국장생’ 3자가 적혀 있고, 또 하나에는 ‘황장생’3자가 새겨져 있다. 통교사(通敎寺), 미황사(美黃寺), 도솔암(兜率庵), 관음굴(觀音窟), 서방굴(西方窟), 수정굴(水精窟) : 모두 달마산에 있다.” 

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해남 달마산에 관음굴이 있다고 하였다. 달마산 역시 바다를 끼고 있어 관음신앙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월출산과 달마산 모두 해양신앙인 관음이 머물렀던 곳이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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