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의 보고(寶庫), 읍성을 걷다 (끝)
■ 전북 고창군 무장읍성
읍성에는 깊은 시간이 쌓여 있다

 

무장읍성 역사와 복원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무장읍성(사적 제346호)’은 지난 1991년 사적 346호로 지정됐다. 길이 1천400m에 13만2천231㎡(4만평)의 면적에 객사, 동헌, 진무루 등이 있다.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을 두고 군사·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 명이 동원돼 4개월간 축조한 곳이다.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 중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복원됐다. 

방어시설로서 해자와 성벽의 간격이 옹성부분에서 절반 정도로 좁혀지는 양상이 일반적이나 무장현 관아와 읍성의 후대의 해자는 오히려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어 특이한 구조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후대 해자에서는 해자를 건너는 적교(吊橋) 시설도 확인됐는데 정면 3칸, 측면 2∼4칸의 규모로 직경 30∼40cm 내외의 대형 목재를 2중으로 받치고 있는 교각구조를 하고 있다. 평면형태로 볼 때 중앙부는 마차 등을 이용한 물자 이동로로, 양측면은 사람들의 이동로로 구분되는 것으로 판단되며 현재까지 확인된 해자의 적교 시설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평가된다. 최대 규모의 적교 시설은 2015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정면 14칸(54.5m), 측면 3칸(11.5m)의 국내 최대 규모의 사창건물지(社倉建物址)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등 무장읍성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읍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확보했다. 사창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모아두는 창고이다.

성내에는 취백당(翠白堂)의 동헌과 송사지관(松沙之館)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객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무장현의 설치와 함께 무장진(茂長鎭)의 병마사가 현의 업무를 관장한 데서 행정적인 기능보다 군사적인 거점 지역으로서의 기능이 더 강한 읍성으로 볼 수 있다. 

무장진은 1417년 왜구 방어를 위해서 전라병영을 광산현(光山縣)에서 강진현(康津縣)으로 옮기면서 방어 지역의 중첩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흥덕진(興德鎭)을 부안진(扶安鎭)으로, 목포진(木浦鎭)을 무장진으로 옮겨 설치하게 됐다. 그러나 세종 이후 현감이 파견되면서 무장진은 폐지됐다.

무장읍성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봉기 장소로써 큰 의미가 있다. 당시 고부(정읍) 군수이자 악덕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해산한 농민군이 관군에게 보복을 당하고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정읍과 부안, 고창 일대의 동학 세력이 모여 무장읍성에서 농민혁명을 일으켰다. 

복원과 발굴 15년째 성과

우리나라의 모든 읍성은 그곳 모두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이 담긴 그곳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비록 일제강점기와 현대화를 거치면서 사라졌지만 그 일부는 땅속에 묻힌 채로 남아있다가 발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며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발굴조사는 고창군에서 2003년 복원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한 후 연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건물지와 시설물, 성벽, 문지, 해자(垓子) 등이 확인됐다. 발굴조사 성과와 고지형 분석을 바탕으로 읍취루, 동헌의 담장과 삼문, 연지(蓮池, 연못)와 정자 등이 복원됐으며 북·서벽의 정비 등도 진행 중이다.

특히 사창과 관련된 건물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전국 각 지역의 읍성 건물지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무장읍성 주변의 경제 규모를 한 눈에 가늠하게 해주고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사창 규모는 100평, 정면 11칸 측면 3칸(33m×10m)의 규모로, 화재를 막기 위해 외벽을 석재로 축조한 형식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선원무장읍지(全鮮元茂長邑誌, 1922)’에 의하면 사창은 ‘객사 동쪽에 소재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으며, 비변사인(印) 방안지도(1739년 이후), 해동지도(1750년대), 여지도(1765년), 광여도(1800년대), 고지도 무장현도(1857년), 무장현도(규장각) 1872년, 전라도 무장현도(19세기) 등 고지도에 기록된 ‘사창’ 건물의 실체가 드러나기는 처음이다.

또한, 조선 시대 훈련청과 군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되면서 화약 무기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11점이 2018년 출토됐다. 

비격진천뢰는 조선 선조 연간에 발명되었으며 목표물에 날아가서 천둥 번개와 같은 굉음과 섬광,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면서 폭발하는 작렬(炸裂) 시한폭탄으로 완구(碗口)라는 화포에 장전해서 사용했다.

호남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이 왜구의 방어를 위해 축성된 점으로 보아, 훈련청, 군기고 등 건물지, 비격진천뢰와 포대시설 등은 무장읍성의 군사적인 성격을 고고학적으로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무장읍성 축제

고창군은 (사)무장읍성보존회에서 기획한 제1회 무장읍성축제를 지난 2019년 5월 18일 무장읍성 일원에서 열었다. 고창읍성의 역사문화를 활용한 행사를 오랜 기간 해왔던 노하우로 무장읍성에 대해서도 이 읍성만의 역사문화관광 컨텐츠를 발굴해 축제를 열고 있다. 

‘무장읍성 602년 조선시대 과거로 가자’라는 슬로건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무장읍성의 정체성을 정립하겠다는 의도로 기획하고 진행했다. 

특히 2018년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서 출토된 ‘비격진천뢰’ 사진 전시와 발굴현장 공개 프로그램이 진행돼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기회가 됐다.

처음으로 개최된 무장읍성축제에는 심원면을 비롯해 해리면, 상하면, 공음면, 대산면, 성송면, 무장면, 아산면에서 대거 참여했다. 따라서 주민 주도형 축제로 기획돼 무장면민들의 주도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축제로 자리매김해 각별한 의미를 담아냈다는 평가다.

올해 2회 축제는 9월, 축성 605주년을 기념하고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다’를 주제로 열렸다.

무장읍성 축제는 지역주민들이 직접 만들어가는 주민 주도형 축제로 의미가 크다. 100년 만에 연꽃 씨앗이 발아한 무장읍성 연못에선 대형 연등도 등장했다. 축제에 참여한 지역민과 관광객들이 소원지를 써서 띄우면서 축성 605주년의 위상에 맞게 지속적인 축제로 발전하기를 기원했다.

무장읍성보존회 관계자는 “지역민들이 준비한 축제라서 더욱 빛났다”며 “무장읍성의 역사성과 축제의 독창성을 지역민들과 함께 살려 앞으로 더욱 알찬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문배근ㆍ김진혁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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