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행  /영암지역자활센터 센터장/동아보건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영암군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전라남도교육청 교육참여위원장
이삼행  /영암지역자활센터 센터장/동아보건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영암군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전라남도교육청 교육참여위원장

국민 앞에 진정으로 사죄하는 모습 필요

10.29 이태원 대형참사로 156명이 희생되고 157명이 다쳤다. 세월호 사건 이후 또다시 전 국민이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편히 쉬소서”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하세요” 국민은 안타까움과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축제를 즐기려고 거리에 나온 젊은이들이 이유도 없이 희생당한 현실 앞에 국민은 묻는다. 왜 말도 안 되는 이런 대형참사가 발생했는가? 미리 예방할 수는 없었는가? 

젊은이들은 3년 만에 노마스크 첫 할로윈 축제에 들썩였고, 수많은 인파가 모일 거라고 예상됐음에도 정부의 안전대비책은 없었다. 이태원 참사가 사회재난인 이유이다. 즐기러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에 몰린 젊은이들, 그러나 이태원 대형참사에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책임자가 없다. 대통령, 국무총리부터 행정안전부 장관까지 “주최가 없는 행사에 대한 안전 법령이나 매뉴얼이 없다” “경찰과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한다고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축소하려고 한다. 현재 참사의 원인은 경찰의 무능력과 안이한 대처로만 집중되고 있다. 이태원 대형참사는 인재이다. 참사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과 긴급상황에 신속한 대처 능력이 없었다. 정부 책임자들은 말로는 무한책임을 얘기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고라며 사죄하지 않고 버티고 버티다가 일부가 눈물의 사과를 한다. 이런 경우를 거짓 눈물 이른바 ‘악어의 눈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회적 공감이 없는 정부 책임자

엘리자베스 A 시걸 교수(사회복지학 교수)는 사회적 공감을 “다른 사회적 집단 및 사람들의 삶과 상황을 인식하고 경험함으로써 이들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정치인이나 고위관료들의 사회적 공감 능력이 클수록 그 사회는 더 행복한 사회가 됨을 지적했다. 행복한 사회의 촉진제로서 '공감(empathy)'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적 공감이 부족한 정치인과 관료는 사회집단을 이해하지 못하여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독선과 아집으로 통제하며 지배하려고 한다. 

정부 책임자들은 희생자, 유가족, 국민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제로다. 그들은 비극적인 참사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없이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고 참사를 축소하려고만 한다. 외국의 주요언론들은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며 윤석열 정부의 예방과 응급대처 능력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 언론들은 어떠한가?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와 상처 입은 국민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깊은 사회적 공감이 있을 때 진정한 반성과 책임자들을 밝혀 낼 수 있다. 

지난 9월에 발간한 4.16 세월호 참사 종합보고서는 박근혜 정부를 “무책임은 조직적이었고 임무 방기는 집단적이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책임을 회피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며 결론부에 지적하고 있다. 또다시 세월호 진상규명의 어려움처럼 되풀이되는 것인가?. 

사회적 공감 능력이 없이 행복한 미래는 없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능력, 추론능력, 지각능력, 언어의 이해능력을 인공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그동안 인간이 해온 많은 일을 인공지능이 더 잘 수행하게 되었다.

정재승 교수(뇌과학자)는 인간만이 잘 할 수 있는 일은 서로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공감'(empathy)이라고 한다. "공감은 지능이다. 자연스럽게 배우지 않아도 마음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잘 하려고 노력하고 뇌를 많이 써야만 가능한 프로세스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감정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려 노력하는 인지적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감은 평생 교육해야 하는 중요한 요소라며 강조한다. 

정부 책임자들은 사회적 공감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높은 지위에 있는 권력자들은 공적 업무에 많은 주의를 집중하는 반면 타인들의 사정을 헤아리는 데에는 관심도 적고 공감의 수준도 낮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다양한 집단들과 함께하고 경험하면서 공감 능력이 향상될 수도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수용하는 노력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들에게서 국민들의 입장을 헤아리는 따스한 사회적 공감을 기대하는 것이 허망한 일인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지옥철이라는 지하철, 만원 버스, 산업현장 등 사회 곳곳에서 항상 생명이 위협받는 환경속에 살아간다. 나아가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전쟁 위협까지 느끼고 있다. 국가가 안정되고 평안하고 국민들이 걱정없이 잘 사는 태평스런 나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10.29 이태원 참사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난 비극이 아니다. 사회적 공감이 있었다면 막을 수 있는 참사였다. 시스템이 아무리 잘 돼 있어도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사회적 공감이 없다면 정부 책임자들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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