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의병장 새롭게 조명
진입로 등 미비, 대책 서둘러야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 장군이 모셔져 있는 도포면 봉호리 시묘 유적에 최근 참배객이 잇따라 찾고 있다. 

지난 11월 3일 양달사 시묘 유적에는 초당대학교 국제학부 외국인 학생 40여 명이 찾아 참배했다. 또 이날 나주시민 30여 명과 신안 비금중학생 20여 명, 그리고 영암주민 30여 명도 양달사 시묘 유적에서 참배한 뒤 영암성 대첩에 대한 관계자의 설명을 청취했다. 이에 앞서 지난 10월 8일 시종면 주민과 목포 문태고 학생 40여 명이 시종 마한유적을 거쳐 양달사 장군의 얼이 담긴 시묘 유적을 찾았다. 11월 4일에는 목포 혜인여중생 30여 명도 방문 예정으로 있어 의병장 양달사 장군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시묘 유적으로 통하는 진입로가 좁아 버스진입이 어렵고 화장실, 쉼터 등이 마련되지 않아 단체로 몰려든 관광객과 참배객들이 크게 불편을 겪어 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됐다.

한편 영암군은 2019년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 유적인 영암군청 앞 ‘장독샘’과 도포면 봉호리 ‘시묘유적’ 2곳을 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한 바 있다. ‘장독샘’은 1555년 을묘왜란 때 영암성을 포위한 왜구로 인해 성안의 백성들이 기갈에 허덕이자 양달사 장군이 군령기를 높이 들고 호령한 뒤 땅을 내리찧자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뜻밖의 광경을 바라보던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솟아오르는 물로 갈증을 달래고 사기가 충천하여 수많은 왜적을 섬멸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 봉호리 ‘시묘유적’은 양달사 어머니와 의병에 함께 참여했던 형제들이 함께 묻힌 곳으로 1555년 5월 을묘왜변 당시 양달사 의병장이 해남 현감직을 내려놓고 시묘살이를 했던 충효의 산실이다.

의병장 양달사는 도포면 봉호정에서 태어나 18세에 무과에 합격하고 훈련원 습독관 등으로 전전하다 10년 후에는 중시에 급제하여 전라좌우수영 우후를 거쳐 해남 현감을 역임했다. 어머니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1555년 5월 왜구가 서남해안 10여개 성을 잇따라 함락시키고 24일 영암성을 포위하자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영암성을 포위한 왜구를 물리친 호남을 구한 호국영웅이다. 하지만 당시 의병이라는 이유로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正史)에는 기록이 거의 없지만, 여지도서나 호남읍지 등 향사(鄕史)에 양달사 의병장의 활약상이 자세히 기록되면서 1847년 10월 17일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영암군은 1971년 장독샘에 공적비를 건립하고, 1974년 양달사 의병장 어머니의 묘소 앞에 호남창의영수(湖南倡義領袖) 양달사 장군 순국비를 건립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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