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행정 중심지, 고흥반도 치소 역할
역사문화의 보고(寶庫), 읍성을 걷다
■ 전남 고흥군 흥양읍성

흥양읍성의 역사

고흥은 본래 장흥부 묘부곡(猫部曲)이었다가 고려 충렬왕 11년(1285년)에 고흥현으로 승격했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왜구가 날뛰면서 이를 피해 보성군 조양현으로 관아를 옮겼다가 이후 세종 23년(1441년) 보성군 관할 남양현과 합쳐 ‘흥양’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다시 고흥군이 된다. 

옛 흥양현은 서남해안을 낀 고흥반도 행정치소이자 조선 수군의 중요 방어기지로 선조 때 전라좌수영 산하 10개 군사기지는 5관5포였으며 그중 1관4포가 흥양현과 그 산하 해안 고을에 자리했다. 1관이 흥양현, 4포가 사도진, 녹도진, 여도진, 발포진 등이다. 흥양현이 주축 군사기지였으며 위치는 고흥읍 일대이다.

흥양읍성은 정확한 축성 시기는 나타나지 않으며 낮은 주월산을 뒤에 끼고 있지만 모양은 평지읍성에 가까우며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조선 전기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본래의 모습은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 등 옛 지도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성곽 위에는 여장(女墻), 곡성(曲城)도 있다. 성 안에는 근대까지 옛 동헌이 있었지만 오늘날 고흥군청이 차지하고 있다. 옛 관아 건물로는 존심당(存心堂)만 보존돼 있다. 

성벽의 총 길이는 1.7㎞ 가량이며 지금은 북벽과 서벽의 일부 이외에는 대부분 손상됐다. 성벽은 먼저 지표면을 고른 뒤 그 위에 편편한 석재를 한 단 올려놓고 15~20㎝ 정도 뒤로 물려 2단부터 수직으로 쌓아 올린 모습이며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막돌을 섞어 쌓았는데 대개 높이는 6m, 폭이 4m이다. 성벽 아래쪽에는 큰 석재를 썼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은 석재를 쌓아 놓았다. 흥양읍성에서는 현재 옥하리 235번지 길에 있는 남문터와 옥상마을 145번지의 북문터 그리고 서문리 140번지의 서문터 등 세 군데의 문터가 확인되었고 네모난 치성(雉城, 성벽이 밖으로 튀어나온 부분)이 세 군데 남아있다. 

읍성을 대표하는 두 기의 홍예교는 서문터 홍예교와 남문터 옆 홍예교가 남아있다. 서문터 홍예교는 읍성 뒤 골짜기에서 개울물이 흘러들어오는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상판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두가 달려 있다. 규모는 높이 4.5m, 길이 8.7m이며 하천 양안에 장방형 돌을 쌓고 그 위에 사다리꼴 돌을 거꾸로 끼워 맞춰 아치형 상판을 만들었다. 장방형 지지대 안쪽 면에 굵게 판 자국이 있는데 쇠창살을 끼워 걸쳤던 흔적이라고 하며 하천을 통한 외적의 잠입을 방어하는 시설이다. 남문 터 홍예교는 서문 터에서 하류 150m쯤 아래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 6m, 길이 10m로 읍성 안 개울물이 빠져나가는 자리다. 두 홍교는 원래 서쪽과 남쪽 성벽과 이어져 있었지만 성벽이 사라져 지금은 각각 떨어져 있으며 사실 교각이 아니라 읍성 안으로 물이 흘러들고 나가는 수구(水口)로 만들어진 것이다.

임진왜란과 흥양수군

흥양(고흥반도)에는 1관4포가 있었는데 1관이 흥양현, 4포가 사도진, 녹도진, 여도진, 발포진 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흥양(고흥)수군과 백성들은 전라좌수영 수군으로 참전하고 병참에 참여하고 군선을 만들기도 했다. 초기 좌수영 조선소에서 일했던 214명의 목수 중 77명이 고흥 출신이었다. 

당시 흥양현에서는 비상 통신수단인 봉수를 정비하고 병선 건조를 위해 23곳의 소나무밭을 지정해 관리 감독했다. 팔영산, 마북산, 천등산, 소록도 등의 소나무는 전선을 만드는 데 활용됐다. 

고흥반도 해안에 포진돼있던 흥양수군은 전라좌수군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전라좌수군이 첫 출전할 때 전라좌수영 함대에 배치된 흥양수군의 위치를 보면 그 활약상을 알 수 있다.

흥양현감 배흥립 전부장, 녹도만호 정운 후부장, 사도첨사 김완 좌척후장, 여도 권관 김인영 우척우장, 영군관 나대용은 유군장으로 참전해 함대에 배치됐으며 나대용은 발포만호가 부재 중이어서 첫 출전 당시 유군장을 맡았다. 이 기록을 보면 흥양수군에는 전라좌수군 함대의 전후좌우를 책임지는 핵심 지휘관들이 있었다.

고흥 수군 출신 지휘관으로 선무원종 1등 공신에 책록된 인물들에는 흥양현감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과 그의 후임자 송여종, 사도첨사 김완, 정유재란 시 흥양현감 최희량과 송대립, 송희립, 진무성, 신여량, 송상보, 신제운, 신여탁, 박륜 등이 녹권에 올라있다.

이러한 흥양수군의 역사는 문화재청 공모사업인 2021년 생생문화재 ‘흥양수군 탐험대’ 문화유적 체험으로 활용됐다. 행사는 고흥 절이도 목장성과 고흥 쌍충사 일원에서 개최했다. 역사유적 답사, 문화공연, 흥양현 옛지도 퍼즐 맞추기, 영패 만들기 체험 등으로 구성됐다. 역사유적 답사는 정유재란 시기인 1598년 음력 7월에 벌어진 절이도해전 423주년 기념으로 거금도(절이도) 일대의 문화재를 활용했다.

흥양수군 탐험대는 ‘1관4포 흥양수군’, ‘흥양수군이 별이된 바다’ 등 총 4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으며 답사유적지는 송씨쌍충일렬각, 송씨쌍충정려, 신여량장군정려, 쌍충사, 발포진성, 여도진성, 흥양읍성, 절이도목장성 등 흥양수군의 유적지를 탐방했다.

고흥군청 관계자는 “생생문화재 활용사업은 고흥군에서 처음 시작한 사업으로 이를 통해 군민과 관광객들이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자원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읍성 복원 위한 군청 이전

흥양읍성 안에는 근대까지 옛 동헌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고흥군청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옛 관아 건물로는 존심당(存心堂)만 보존돼 있고 민가와 공공기관이 들어차 옛 모습을 찾기 힘들다. 아문은 영조 41년(1765)에 건립된 솟을삼문으로 세 칸에 모두 두 짝 널판문이 달려 있으며 현재 고흥경찰서가 있는 곳은 흥양현 객사 터였다.

이에 고흥군은 2016년 숙원 사업인 새 군청사 건립을 시작했다. 남계택지 지구를 조성하고 그 내부에 청사 건립 부지를 마련해 도시개발과 함께 읍성과 관아 복원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청사는 474억원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6층, 연면적 만 5천500㎡ 규모로 건립된다.

이러한 고흥군의 움직임은 문화재 복원과 도시개발에 관련돼 좋은 사례로써 흥양읍성과 부속 건물들을 복원하려 등암리 주변에 남계택지를 조성하고 이곳에 군청을 이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충남 홍성군이 홍주읍성 복원을 위해 군청을 옥암지구로 옮겼던 사례와 비슷하다.  

고흥군청 관계자는 “쇠퇴하는 구도심을 역사문화를 통해 살리면서 새 터전을 위한 도시개발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다른 지역들도 적극적인 역사문화 행정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문배근ㆍ김진혁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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