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 어우러진 모양성제국방문화재 역사교육 산교육장
역사문화의 보고(寶庫), 읍성을 걷다
■ 전북 고창군 고창읍성(모양성)

고창읍성 역사와 복원

전북 고창은 풍수지리학상, 오행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드문 지역으로 동쪽과 남쪽이 높은 반면 서북쪽이 낮게 형성돼 있다. 따라서 통풍과 햇빛이 골고루 퍼져 농작물 재배는 물론 인간의 두뇌 형성에도 아주 좋은 인맥의 고장이자 예향으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다.

고창에는 고창읍성, 무장읍성, 흥덕읍성 세 개의 읍성이 있으며 이중 고창읍성은 백제시대 ‘모양부리’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모양성’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졌다. 

고창읍성(사적 제145호)은 호남 내륙의 방위를 위한 전초기지로 1453년(단종 원년)에 왜적을 막으려고 자연석으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1.7km, 높이는 4~6m, 면적은 5만여 평이다. 동·서·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 성 밖의 해자 등이 딸려 있다. 또한 읍성 내부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 등이 있었으나 전란 때 모두 불타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 있다. 지난 1965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지금도 45년째 마무리 복원 중에 있다.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대부분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 인근의 절에서 나온 석재들을 깨뜨려 쓴 것도 있고 북문인 공북루의 주춧돌 높이는 제각각이라서 1m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깔려 기둥이 바닥까지 내려온 것도 있어서 이채롭다. 낮은 야산을 이용해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기법을 사용했다.

고창읍성은 전라좌우도 주민들이 고려 말부터 법성포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막기 위해 반등산(743m)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상에 완만한 계곡 사이를 두른 원형으로 축성됐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렇듯 야산을 이용해 바깥쪽만 성을 쌓는 축성 기법으로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했다.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전초기지로 축성됐고 호남내륙을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지켜왔다. 

고려 말기 축성양식을 띤 조선조 초기의 대표적 평산성인 고창읍성은 나주진관 입암산성과 연계해 호남내륙을 방위하는 전초기지로 지난 1965년 6월 7일 고창읍성이 사적으로 지정되고 1974년에 민간기구인 ‘고창읍성 복원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전북도와 함께 당시 문화공보부에 건의, 복원계획이 세워질 수 있었다. 민간기구가 설치되면서 공북루를 해체한 후 복원하고 길이 1,625m, 폭 5m의 성외 도로를 개설하고 사방식수를 실시했다. 1975년에는 성곽 430m를 보수하고 단청·조경사업을 했으며 복원 3차 연도인 1976년에는 서문복원과 성곽보수, 고창여중·고 이전을 위한 부지만 매입해놓은 상태에서 사업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사업이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1989년 문화재관리국이 국방문화재로 정화·보존해 후세들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복원사업을 직접 실시하면서 고창여중·고의 이전을 끝냈고 동헌과 내아, 풍화루를 복원했다. 1990년 객사(73평)와 연지를 복원하고 경내와 주변 정비를 마쳤다. 1991년에는 객사 행랑과 작청을 복원해 3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고창읍성은 옛 모습을 되찾게 됐다.

고창읍성은 여성들이 쌓았다는 설화가 있고 여성들이 머리에 돌을 얹고 성곽길을 도는 성밟기(답성 놀이)가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한다는데 해마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 전후에 열리는 고창 모양성제 때 지역 여성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줄지어 성밟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읍성 안에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상징으로 세운 척화비가 있다. 금석문에는 병인년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워졌다는 기록과 함께 ‘서양의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고창읍성 북문을 출발해 처음 나오는 치성은 이 지역에서 3·1운동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치성 위 평평한 공터에서 고창청년회 회원과 고창고등보통학교 학생 등 2백여 명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순종의 장례일에 벌어진 6·10만세 운동 때도 청년 학생들이 이곳에 다시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향토축제, 모양성제

고창군과 (사)고창모양성보존회는 읍성의 축성 정신을 잇고 전통문화를 보존 전승하기 위해 ‘모양성제’를 매년 음력 9월 9일 열고 있다. 코로나 19가 완화되면서 올해 49회째 행사가 열렸다.

고창읍성은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밟으면 무병장수한다는 답성놀이가 전래되고 있다. 윤3월이면 전국에서 몰려온 아낙네들의 답성 행렬로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전래풍속에는 성을 밟으면 무병장수하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또 성 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 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해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행렬이 절정을 이룬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 크기의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어야 한다.

고창군청 관계자는 “고창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됐다는 전설로 인해 답성도 부녀자들만의 전유 민속이 됐다”며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됐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민속은 여성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즉 성 밟기는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성이 날씨가 풀리면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고 성벽을 튼튼하게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모양성제에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주민들이 모양성 앞 잔디광장에서 강강술래 노래와 함께 손에 손잡고 원을 그리며 하나가 된 모습에서 활력 넘치는 고창을 엿볼 수 있다. 성을 왜구로부터 지키는 공성전, 조선시대 군사들의 훈련 모습, 수문장 교대의식과 시간을 알리던 경점시보의식 등이 재연된다. 유등 조형물을 곳곳에 설치해 야간 포토존이 마련된다. 낭만충전 버스킹과 모양성 달빛극장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해 방문객을 머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고창의 대표음식인 장어와 국빈만찬에 오른 한우를 할인 판매하고 특산품을 음식으로 판매함으로써 방문객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기존 축제 음식과의 차별성을 두고 있다.

(사)고창모양성보존회는 고창읍성 복원에 관여하고 있으며 모양성제를 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축제로 만들고 보존하는 민간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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