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28-마한은 대국인가, 소국인가(下)

지난 10월 8일 전라남도가 주최하고 전남문화재단과 초당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주관하는 2022 마한 행사의 하나로 수행되고 있는 ‘마한 쏙쏙쏙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주제의 스탬프 투어가 마한문화공원 일원에서 펼쳐졌다. 
지난 10월 8일 전라남도가 주최하고 전남문화재단과 초당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주관하는 2022 마한 행사의 하나로 수행되고 있는 ‘마한 쏙쏙쏙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주제의 스탬프 투어가 마한문화공원 일원에서 펼쳐졌다. 

지난 10월 8일 전라남도가 주최하고 전남문화재단과 초당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주관하는 2022마한 행사의 하나로 수행되고 있는 ‘마한 쏙쏙쏙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주제의 스탬프 투어가 마한문화공원 일원에서 펼쳐졌다. 모두 6회로 진행된 행사의 첫 회로, 시종 부녀회, 문태고 및 영암중학교 학생 등 40여 명이 참가하였다. 신·구가 조화된 참가자들을 보며 취재차 나온 언론인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이들 언론인은 영암 마한의 고분유적 및 해양유적인 남해신사의 가치에 대해 깊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필자는 이번 전라남도 마한 행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혼신을 다하고 있다. 특히 시종부녀회원 및 어린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필자의 수고로움에 주는 커다란 선물이다. 아무쪼록, 이번 행사가 영암의 마한 가치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남도 마한’

‘마한이 대국인가, 소국인가’라는 필자의 글이 예상대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작금 논란이 되고 있는 한 정치인의 발언도 결국은 ‘무지한 역사’의 소치이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최근 나주에서 마한 행사가 있었다. ‘Play…’라는 제목처럼 관중들의 눈요기가 적지 않았다. 유명 트로트 가수까지 출연함으로써 청중 동원에도 나름 성공하였다. 축제가 열린 국립나주박물관 인근에 ‘해상강국 마한’이라는 플래카드가 유난히 아름답게 보였다. 처음에는 낯설게 보였던 ‘해상강국’이라는 표현을 마한왕국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반남인들이 스스럼없이 사용한다. 지극히 당연하다. 이들은 ‘마한소국’ 콤플렉스가 아니라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한 마한왕국의 실체를 밝히려 하고 있다. 

하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남도 마한’이라는, 아마 ‘나주 마한’의 홍보물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는 글이 단톡방에 올라 있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대로 옮겨본다. 
 
남도 마한

마한은 54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한 중 가장 큰 세력이며 그 범위는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에 걸쳐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 54개 소국 명칭이 소개되었고, 큰 곳은 1만 가, 작은 곳은 수천 가였다고 전한다. 마한 땅인 한강 유역으로 이주해 온 백제는 그 세력을 키워서 마한 주도세력인 목지국을 흡수하고 충청도까지 세력을 넓혔다. 

목지국이 사라지자 영산강 유역의 20여 마한 소국은 독자 활동을 개시하였다. 중국의 진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권력자의 무덤으로서 옹관묘를 발전시켰다. 우리는 그들을 ‘남도 마한’이라고 부른다. 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가야를 공격하였고, 뒤이어 전라도 남해안 침미다례를 정복하였다. 마한 여러 소국들은 스스로 항복하였고, 마한세력은 백제의 지방 귀족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백제 귀족이 된 이후에도 마한의 후예들은 오랫동안 남도 마한 지역을 다스리는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이 글은 필자가 아무리 읽어 보아도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제의 귀족’으로 지내는 것이 ‘남도 마한’의 정체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병도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놓고 ‘남도 마한’이라 제목을 붙였다. ‘1만 가’라면 적어도 5만이 넘는 인구이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안 된다. 마한 시대에 5만이라는 인구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렇게 커다란 세력을 형성한 정치체를 소국이라고 하는 것인지 더이상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필자는 해남반도의 침미다례와 시종·반남에 형성된 내비리국, 복암리의 불미국, 보성 복내의 비리국, 득량만의 초리국 등이 대표적인 전남에 소재한 마한의 대국임이 분명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침미다례를 예로 소개함으로써 이 연맹체가 대국인지 소국인지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따르기로 하겠다. 

당시 침미다례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의 강력한 정예병 3만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근초고왕 군대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항복하지 않고 ‘도륙(屠戮)’ 당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결사 항전하였다. 백제가 ‘남만’, 즉 ‘남쪽 오랑캐’라고 불렀던 것은 백제의 인식 반영이다. 백제가 침미다례를 도륙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완전히 씨를 말리려 한 것은 침미다례가 백제 중심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연맹세력을 구축하며 맞섰던 것에 대한 반작용의 산물인 셈이다. 침미다례가 마한 연맹체의 중심세력의 하나로, 위지 동이전의 ‘대국’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중국 측 진서(晉書) ‘장화전’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282년)동이 마한의 신미 등 여러 나라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살았다. 유주와 4천여 리 떨어져 있다. 여러 대에 걸쳐 사신을 보내지 않았던 20여 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東夷馬韓新彌 諸國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二十餘國, 並遣使朝獻) 9월에 동이 29국이 귀화하여 방물을 바쳤다.”

백제와 침미다례의 관계

3세기 말 마한 세력과 중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명한 기록이다. ‘신미’는 유주와 4천여 리 떨어져 있고 바다를 끼고 있는 곳으로 미루어 볼 때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추정되고, ‘침미’와 음이 비슷하므로 ‘침미다례’와 동일 왕국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시간상으로 볼 때 신미국을 침미다례가 계승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중국과 일본 역사서 기록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신미국을 포함한 20여 국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고, 다시 29국이 귀화를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귀화’라는 표현은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을 당시 유주자사 장화가 과장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할 때, 적어도 신미국을 포함한 29개 왕국이 중국에 조공하러 간 사실을 보여준다. 이때 29국은 같은 연맹체로, 시기적으로 3세기 말이면 목지국이 무너진 직후 마한이 정치적으로 요동칠 무렵이었다. 절반 이상이 넘는 마한연맹 국가가 백제 중심의 연맹을 거부하고 신미국 중심으로 강한 결속력을 구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제가 왜 침미다례를 공격하였을까? 371년 겨울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사실과 관련이 있다. 313년 낙랑을 무너뜨리고 남하 정책을 본격화하고 있는 고구려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백제는 후방의 안전 확보가 시급하였을 법하다. 이를테면, 신라를 공격하여 고구려와 군사적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가야까지 공략한 근초고왕은 금강 이남을 중심으로 마한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백제 중심의 연맹체에 맞섰던 침미다례에 대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다. 침미다례는 백제 연맹체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마한 연맹체를 대표하는 왕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백제는 침미다례가 고구려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륙’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강한 군사적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렇듯 중국과의 외교 교섭을 주도하고 고구려와 관계를 맺어 백제를 견제하려 한 침미다례를 과연 ‘소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