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의 보고(寶庫), 읍성을 걷다 ■ 전북 남원시 남원읍성
성 흔적 뚜렷한 곳부터 복원추진...정밀발굴 통해 기단 및 기초 확인

남원성과 만인의총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지방도시)을 설치하고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1982년 사적 제298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7월 28일 남원성에서 남원읍성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전북 남원시 동충동 464-1번지 일대에 소재한다.

남원읍성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 당시 왜군에 의해 성을 끝까지 지키던 민·관·군 1만여명이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사적 272호인 만인의총은 순절한 1만여명의 합장유적으로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학계는 물론 지역 내에서도 남원읍성의 복원을 통해 민족적인 자긍심을 고취하고 미래 후손에게 온전한 문화유산을 물려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1597년 정유재란에 앞서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해 성벽을 높였으나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패하고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 있다.

이곳은 정유재란이 발발하며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양원을 비롯한 명군 3천여 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군 1천여 명이 방어전을 펼쳤고 왜군의 고니시를 중심으로 5만여 명의 대병력이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집결해 공성전을 벌였다. 조명연합군은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만여 명의 민·관·군이 희생됐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사자들을 모아 만든 묘가 만인의총이다. 남원을 함락시킨 왜군은 전주에 무혈입성하고 충청도까지 진출했으나 명랑해전으로 보급로에 문제가 생겨 더 이상 진격하지는 못했다. 

만인의총은 처음 남원시 향교동에 있었으며 1612년(광해군 4) 충렬사를 건립하여 접반사 정기원 등 8충신의 위패를 모셨으며 1653년(효종 4)에 사액을 받았다. 1675년(숙종 1)에 남원 동충동으로 이건되었다. 1879년(고종 8) 사우가 철폐되어 단을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향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단소(壇所)가 파괴되고 재산이 압수당했으며 제사를 금지당했다가 해방 이후 다시 사우를 일으키고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1963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와 남원군과 군민이 합심으로 1964년 현재의 향교동 위치로 이전됐다. 

남원읍성의 성벽의 길이는 2.4km가 넘고 높이 약 4m에 이르며 성 안에는 70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 성 내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에도 너비가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 구성을 볼 수 있다. 근현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며 성곽은 대부분 헐려 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돼 있어 과거 성내의 가로 구성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 읍성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으며 규모가 크고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네모 반듯한 구성과 성내의 가로(길)가 직선으로 구성된 점이 특징이며 옹성·해자·여장·양마장(우마장) 등의 부속시설을 잘 갖추었던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양마장은 중국식이며 이같은 새로운 시설이 설치된 것은 명나라 군대가 개축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남원읍성은 기저부인 기단부가 긴 구간에서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다 평지이면서 지반이 약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육중한 석재를 이용해 성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가 기초부를 ‘V’자형으로 공을 들여 기반을 조성한 부분이 있어 읍성 발굴 사례로는 대단히 특별하다. 해자의 경우 강돌을 이용해 벽체를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해자 축조 기술을 알 수 있는 중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성문은 정유재란 때 훼손되었는데 1692년(숙종 18)에 4개의 성문이 복구되고 동문은 임춘루라 하였는데 복구 때 향일루로 고쳐 불렀다. 남문은 완월루, 서문은 망미루, 북문은 공진루이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파괴되고 이후 재축조됐지만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북문을 제외한 동문·서문·남원이 소실됐다. 또한 남아 있던 북문조차 일제강점기 1911~1913년에 전주-순천 간 도로 개설과 1935년 일제가 전주-순천 철도개설을 이유로 읍성 북문과 서문을 의도적으로 철거하고 남원역을 만들어 만인의총과 남원읍성을 훼손하고 분리했다. 현재 남원읍성은 지난 1998~2000년에 걸쳐 복원된 북벽 200m 정도가 남아 있다.

북문(공진루) 중심 복원 

남원시는 남원읍성 복원정비를 위해 1995년부터 5차례에 걸쳐 문화재청과 발굴조사를 통해 규모와 성문지, 읍성내부 건물지 등을 조사하고 일부는 고증을 마치고 2011년에 남원읍성 종합정비계획이 마련됐다. 2015년에는 문화재청 ‘광복 70주년 일제강점기 문화재 복원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복원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2016년부터 2025년까지 정비사업에 소요될 예산 국비 65억원을 포함해 총 93억원을 확보했다. 

‘남원읍성 복원정비’는 사업비 330억(국비 231억 원, 지방비 99억 원)을 들여 2025년까지 남원읍성 북문과 성벽 등을 중심으로 1, 2, 3차에 걸쳐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북문 복원에 필요한 주변 토지매입, 북문 복원(성벽·문루·성문 설치 등)을 위한 북 성벽(성벽, 치 등) 복원 등이다.

1차는 성벽 주변, 2차는 북문지 주변, 3차는 북문지와 성벽 연결지역으로 나눠 발굴조사와 토지매입, 정비·복원이 진행됐다. 이를 위해 사적 추가지정 확정고시와 1차 성벽주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이중 북문 복원에는 2025년까지 10년간 총 93억원(국비65억․ 시비28억) 투입될 예정이다.

남원시와 문화재청은 이를 위해 명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복원을 추진 중이며, 먼저 토지매입, 발굴 등 복원을 위한 준비사항을 시행하고 일제강점기 훼손된 부위, 구간에 대한 본격적인 복원을 추진할 예정이다.

남원시는 2019년 2차 북문지 주변 발굴조사를 완료하고, 2020년에는 3차 북문지와 성벽 연결지역의 매입과 정비를 마치고 성벽 정비를 진행했다. 2019년 1차 성벽 주변 발굴조사를 완료한 결과로 남원읍성 북문지 형식을 추정할 수 있게 됐으며 기존조사에서 확인된 개구부 중앙 보도시설 규모와 석축 방법, 축조 방법 등을 확인했다.

당시 문화재청 사업은 일제강점기에 강제 훼손된 소중한 문화재의 지속적인 발굴과 보존을 통해 소중한 문화 역사성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옛 모습의 재현은 정비·복원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판단돼 난항을 겪었다. 이러한 이유로 남원시민들과 전문가, 문화재청 등의 의견을 종합해 북문을 복원할 것인지, 성벽 쌓기를 할 것인지, 기단부만 노출할 것인지, 2단까지만 쌓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을 거쳤다가 철저한 역사 고증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며 결국 북문을 중심으로 성벽을 연결하는 부분복원으로 추진됐다.

학계는 남원읍성 복원에 있어 무엇보다 철저한 역사 고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현황조사 및 정비계획 자문위원으로 이재운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장을 비롯해 8명의 위원이 참여하고 있다.

남원시 관계자는 “호국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남원읍성의 복원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우리 시의 과제로 원형대로 복원해 살아 숨 쉬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문배근ㆍ김진혁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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