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26-마한은 대국인가, 소국인가(上)

나주 복암리 금동신발 /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신촌리 고분군, 그리고 영암 시종 고분군의 대형 고분은 이 지역에 거대한 정치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나주 복암리 금동신발 /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신촌리 고분군, 그리고 영암 시종 고분군의 대형 고분은 이 지역에 거대한 정치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왜곡된 역사 바로 잡아야

마한은 대국(大國)인가, 소국(小國)인가. 어리석은 질문일 줄 모르겠다. 마한은 소국이라고 전문가이든, 일반인이든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 특히 마한의 독특한 문화요소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하는 전남지역조차 ‘소국’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2012년 나주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되어 2017년 출간된 ‘전남지역 마한 소국과 백제’라는 전문서가 확실한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마한은 소국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하기 위해 전라남도나 각 시군에서 무척 노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6월 해남에서 개최된 ‘해남 현산에 깃든 마한 소국’이라는 학술세미나를 들 수 있다. 필자가 아무리 해남반도에 마한의 ‘대국’ 침미다례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를 고고학적으로, 문헌학적으로 내놓아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필자는 ‘대국’도 아닌 ‘소국’의 실체를 밝히려고 많은 세금을 투여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역사 왜곡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한번 세뇌된 생각을 벗어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필자가 아무리 마한은 ‘대국’과 ‘소국’으로 구성된 연맹체 국가라고 외쳐도 마이동풍이다. 먼 훗날 역사 왜곡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필자는 고대사가 전공이지만 대학에서 근현대사를 20여 년 강의한 탓으로 그 시대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농민전쟁 이후부터 6·10민주항쟁에 이르는 우리 지역의 근현대사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필자는 지역사 전공자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해방이후 75년 동안 근현대사 전공자들이 시도하지 않은 광주·전남 3·1운동 판결문과 학생운동 판결문을 번역 정리함으로써 선열들의 빛나는 독립운동사를 정리하려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광주·전남은 한말 ‘의병전쟁의 성지’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 없다. 1909년 전국 의병전쟁의 50% 이상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의병전쟁에 참여하였다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이는 전국 대비 13%도 채 되지 못하고 있다. 

영암의병도 필자가 2019년 ‘영암 의병사 연구’를 펴낼 때 파악한 의병 숫자가 187명이었으나 서훈자는 14명에 불과하였다.(국가보훈처의 공훈록에 영암 출신으로 등재된 이는 7명) 곧 청사에 빛나는 전과를 올린 영암의병의 실체를 우리는 알고 있지 못한 셈이다. 이번 3·1운동 미서훈자 발굴 사업에서도 해남 다음으로 많은 미서훈자가 나온 곳이 영암이었다. 말하자면, 영암은 순국선열들의 훌륭한 업적을 찾는 일을 그동안 소홀히 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필자가 누구 탓하자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후손이 똑똑하면 없는 조상의 공도 만들어지지만, 후손이 그렇지 못하면 선조의 공적도 빛을 잃게 된다는 지극히 평범한 이치를 우리는 목도(目睹)하고 있다. 이는 영암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남 대부분 지역이 같은 현상으로, 50보 , 100보일 따름이다. 고흥도 마찬가지였다. 팔영산 만경암이 고흥 의병의 빛나는 전투지였지만, 이들의 실체를 밝히려는 노력이나 이들의 전투 사실을 기억하려는 노력조차 없어 보였다.

기록과 문헌에 나타난 실체 

영암을 비롯하여 나주, 해남, 보성 등지에는 기록이나 문헌을 통해 마한 대국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신촌리 고분군, 그리고 영암 시종 고분군의 대형 고분은 이 지역에 거대한 정치체가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특히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과 역시 동형의 금동관 편이 출토된 영암 시종의 쌍고분은 두 지역이 같은 연맹체를 구축한 대국 또는 왕국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해남반도나 함평 등지의 거대 고분 역시 이곳에 대국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근거이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개 소읍이 있는데 모두 ‘국(國)’으로 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김부식의 표현에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작은 소읍’이라고 언급하였다는 사실과 ‘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우선 ‘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김부식이 이들을 정치체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것은 ‘소읍’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이다. 김부식은 잘 알다시피 신라 중심의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삼국사기를 서술하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마한이나 백제에 대한 역사 인식을 의도적으로 축소하려 하였을 법하다. 특히 마한에서 변한, 진한이 나온 역사적 인식을 김부식이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이는 통일신라 말 유명한 학자 최치원도 ‘마한–백제’로 이어지는 역사 인식을 ‘마한–고구려’로 변개(變改)하려 하였다는 사실에 익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초기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대국(大國)은 1만여 호, 소국(小國)은 수천 호, 총 10여만 호’라 하여 마한이 ‘주요 지역에 분포한 대국’과 ‘소국’으로 구성된 연맹체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애써 ‘대국’의 존재를 외면하고 ‘소국’ 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한이 한국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부정하려는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와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다.

소국과 대국이 공존한 연맹체

삼한의 ‘국(國)’ 규모는 평균 인구 1만여 명으로 지금의 ‘군(郡)’ 단위로 추정되고 있다. 곧 백제 성왕 때 백제와 통합한 전남의 마한 연맹체 13곳 역시 ‘국(國)’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학자들이 추정한 전남의 마한 왕국 13곳과 통합 이후 설치된 지방행정 구역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정이 설득력을 준다. 지금의 ‘군(郡)’에 해당하는 ‘국(國)’은 정치 발전단계로 이들이 연합하여 연맹체를 이룬 것이 마한 등이었다. 국(國)은 규모에 따라 직경 10km 정도의 읍락 수준의 소국과 30km 정도의 몇 개 소국을 포괄한 지역 규모의 대국으로 구분되고 있다. 

마한의 왕들은 중국식 ‘왕’이라는 칭호 대신 대국은 ‘신지’, 소국은 ‘읍차’라는 칭호를 썼다. 신라도 중국식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6세기 지증왕 때 들어와서다. 신라의 왕호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을 거쳐 6세기에 들어 비로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5세기 말까지 신라는 ‘왕’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은 셈인데, 그렇다고 5세기까지 신라를 왕국이 존속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고, ‘소국’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 가운데 유독 마한은 인구 구성면에서 대국, 대·소국, 소국 사이에 규모 차이가 크지 않았다. 이는 인구 규모가 대국 4~5천여 호, 소국이 6~7백여 호로 차이가 큰 진한이나 변한보다 정치 발전 단계가 늦은 느슨한 단계의 연맹체를 이루는 요인이 되었다. 마한은 우두머리와 백성이 서로 섞어 살아 정치적 통제력이 약하고 연맹체 사이의 관계도 수직적인 관계보다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상호 공존하는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반면, 연맹체 사이에 통합도 그만큼 늦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하튼, 마한에 대국이 존재했다는 것은 문헌에서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를 왜 무시하고 ‘마한 소국 전남’이라 하여 전남 마한사의 규모를 축소하려 할까. 그 의도는 무엇일까?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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