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25 - 고대 동아시아 해로를 장악한 영암(하)

마한길 답사 / 지난 8월 29일 마한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한 마한 길 답사에 영암문화관광해설사, 나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영암학회 회원 등 50여 명이 함께 참여했다. 
마한길 답사 / 지난 8월 29일 마한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한 마한 길 답사에 영암문화관광해설사, 나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영암학회 회원 등 50여 명이 함께 참여했다. 

아직 국회 통과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정된 것은 아니나 내년 정부 예산 편성안이 지난 8월 30일 나왔다. 정부 예산안 가운데 전라남도가 건의한 국립마한센터 건립비 17억원이 들어 있다. 이 같은 예산 규모로 볼 때 설계는 물론 착공까지 내년에 시작할 계획임을 알 수 있다. 국립마한센터 건립을 주창한 필자로서는 예산안 반영에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우선, 장소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국립마한센터 장소를 둘러싸고 나주, 영암, 해남이 각축을 벌이고 있어 실제 논의단계에 들어가면 지역 이기주의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국립마한센터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전혀 없다. 국립가야문화센터도 이미 지적한 바 있거니와 구체적인 그림이 나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예산 반영이 이뤄지고, 착공식까지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제 공정 단계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전라남도가 주체가 되어 국립마한센터 건립과 관련된 큰 그림을 속도감 있게 내는 게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 3대 대선공약인 장성 국립심혈관센터 건립은 5년간 희망 고문만 하다 마지막 연도인 2021년 40여억 원이 편성되었다가 유야무야된 경험이 있다. 필자가 앞서 예단했듯이 내년 예산에는 심혈관센터 예산이 전혀 없다. 역사는 이렇게 반복된다. 

지난 8월 29일 마한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한 마한역사문화 답사가 있었다. 영암군의 지원으로 이뤄지는 첫 행사에 영암군문화해설사 30여 명이 참여하였다. 김성수 회장의 노력으로 나주시 문화해설사 10여 명도 함께 했다. 이 자리에는 이영현 양달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등 영암학회 회원들도 참여하였다. 영암의 역사문화에 관심이 있는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시종의 국내 유일 마한역사문화공원 강당에서 필자의 특강을 시작으로 한 마한길 답사는 시종 쌍무덤, 옥야리 고분군, 남해신사, 나주 반남고분군 등 답사로 이어졌다. 쌍고분을 발굴한 이범기 전남문화재연구소장이 옥야리 고분군에서 발굴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번 답사는 김성수 회장이 쌍무덤과 관련된 설명을 하는 등 다양한 형식이 동원되어 참석자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국제항 구림 상대포

덕진나루에 이어 국제항으로 상대포가 주목된다. 구림의 상대포는 이미 왕인박사의 도일 전승이 있는 곳으로 보아 이곳에 국제항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침 조선 후기 지리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의 전라도 편에서 영암의 큰 동네로 구림촌을 꼽고, 무역항으로서 역할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에 들어갈 때는 모두 본군 바다에서 배가 떠났다. 하루를 타고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이 섬에서 하루를 타고 가면 홍도에 이르며, 또 하루를 타고 가면 가거도에 이르고, 여기서 북동풍으로 사흘을 타고 가면 곧 태주 영파부 정해현에 이르고, 만약 순풍이면 하루에 이른다. 남송이 고려와 통하는 데도 정해현 해사에서 배를 출발시키어 7일에 고려 국경에 상륙했다. 그것이 곧 영암군이다. 당나라 때 신라인이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갔을 때도 강나루를 통하는 중요한 나루터와 같이 선박의 왕래가 계속되었다. 고운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는 상인을 따라 당으로 들어가 당의 과거에 합격했다.” 

상대포가 당시 국제항임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사료를 바탕으로 교과서에서도 통일신라말 대당 교역 항구로 영암을 지목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 해상왕 칭호를 받은 장보고가 당에 건너간 항구도 이곳이었다. 영암에 장보고 전승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구림의 서편은 ‘서호(西湖)’라는 바다였다. 내륙 깊숙이 조수가 미치는 곳으로 일찍이 갯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장천리 선사 주거지, 엄길리 철암에 있는 매향비는 이곳 항구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영산 지중해 중심 항구 남해포

다음으로 주목되는 곳이 삼포강 중·하류에 위치한 남해포이다. 남해포가 있는 넓은 영산 지중해를 남해만이라고 부른다. 남해포가 그 중심에 있음을 말해준다. 시종의 외항 구실을 한 남해포는 영산강 하굿둑이 건설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목포에서 이곳을 종점으로 여객선이 다녔고, 둑이 생겨 항구의 기능이 축소되었을 때인 1982년 당시까지도 어선 34척, 수산물 어획고가 32만 톤에 달할 정도로 항구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1997년 남해포에 있는 해신 사당인 남해신사 터를 발굴했을 때, 그곳에서 상평통보, 관영통보, 도광통보 등이 출토되었다. 상평통보는 조선 후기에 사용된 화폐, 관영통보는 일본 덕천가강 때 화폐, 도광통보는 중국 청나라 선종 대의 화폐로 모두 17~8세기에 사용된 화폐들이다. 남해포가 조선 후기까지도 국제 무역이 이루어지던 중요한 항구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동아시아 해양신앙의 상징 남해신사
남해만에 있는 남해포는 화려한 영산 지중해 역사와 역사적 궤를 같이하고 있다. 영산 지중해는 마한 시대부터 중국, 일본, 가야, 동남아시아 등 여러 지역과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항구 입구에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당이 일찍부터 존재하였다. 출토유물로 이미 확인된 전북 부안의 죽막동 제사유적도 마한 시대인 3∼4세기 그곳에 해신당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히려 항로의 중요도로 따지면 남해만은 변산반도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남해만의 중심 항구인 남해포에 있는 해신당인 남해신사는 마한 시대에 있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1005번지에 있는 남해신사는, 원래 터만 남아 있는 지방기념물 제97호 지정된 제사유적이었다. 남해신사는 고려 현종 때 국가 주관의 ‘국제(國祭)’가 되어 ‘잡사(雜祀)’에 편입되는 등 고려 유일의 해신당의 지위를 누려왔다. 고려 후기에 들어 황해도 풍천의 서해단, 강원도 양양의 동해묘 등이 추가로 국가의 재정 후원을 받으면서 3대 해신당의 하나로 불렸다. 하지만 남해신사는 지방관이 치제(致祭)하고 국가가 제물을 부담한 대표적인 해신당이라는 점에서 고려를 대표하는 해신당의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국가의 사전체계에 들어 있는 등 여전히 국제의 지위를 유지하던 남해신사는 후기에 들어 남해당으로 불리며 점차 격도 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남해신사는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비는 전통신앙으로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그동안 누렸던 대표적인 해신당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남해당’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였지만, 아직은 ‘신사’의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려 한 일제는 우리의 전통신앙을 말살하는 작업을 본격화하였는데, 해신당의 폐쇄 조처가 대표적 사례였다. 1908년 조선통감부령으로 나온 조처로 남해신사 등 해신당이 폐쇄되었다. 동해묘는 이 조치에 따라 곧 훼철되었으나 남해신사의 경우는 이보다 늦은 1925년 무렵 훼철되었다. 남해신사 역사성이 뿌리 깊어 총독부도 훼철하지 못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1925년에 훼철되었음에도 70년이 넘도록 남해신사 터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는 용왕에 제를 올리는 신사가 있었던 곳을 신성 지역으로 여겨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주민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신사 터에 묘를 썼던 주민이 멸족했다는 전설은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 

1997년 12월부터 1998년 1월 31일까지 목포대 박물관이 신사 터를 발굴 조사하였다. 건물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석축 시설 등 건물터와 자기편, 기와편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2001년 신당과 내삼문을 복원하였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