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24 - 고대 동아시아 해로를 장악한 영암(상) 

마한 대외 교역로와 남해신사에서 바라본 남해만 / 영암은 서남해 연안 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영산 지중해의 초입에 있어 일찍부터 덕진, 상대포, 남해포 등의 항구가 발달했다.
마한 대외 교역로와 남해신사에서 바라본 남해만 / 영암은 서남해 연안 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영산 지중해의 초입에 있어 일찍부터 덕진, 상대포, 남해포 등의 항구가 발달했다.

역사의 고장, 영암

지난 8월 18일 월출산 기찬랜드에서 전라남도 주관 ‘제3회 마한문화행사’ 관계자 회의가 있었다. 2019년 이른바 ‘마한 특별법’이라 불리는 역사문화자원 정비와 관련된 법 제정을 기념하여 2020년 서울에서 전라남도가 주관하는 첫 행사가 열린 이래, 2021년 나주에서, 그리고 2022년 제3회 행사가 나주와 더불어 마한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영암에서 11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간 열린다.

문화재청장, 전남·북지사, 광주광역시장, 그리고 교육감 등 많은 도 단위 기관장 등이 참여하는 대규모가 대한민국 유일의 ‘마한역사문화공원’에서 열리게 된다. 이번 행사가 마한의 정체성이 오롯이 남아 있는 영암의 마한을 널리 알려 ‘역사의 고장 영암’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 ‘영암 마한’이 영암을 넘어 전남인들의 정체성 형성과 더불어 지역 역사관광자원의 토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마한의 중심지인 시종면민의 관심이 매우 높음을 느끼고 있다. 시종면민, 영암군민들이 ‘마한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암군의 지원으로 필자가 속한 마한역사문화연구회에서 마한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021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부득이 영암여고, 삼호고, 낭주고 등 영암관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였다. 2022년에는 영암군민과 함께 마한길을 걸어 보려 한다. 군민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린다. 

필자는 고분 중심의 가야와 달리 ‘영암 마한’을 비롯한 마한의 특징은 고분과 더불어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활발한 해상교류를 한 해양 문명의 유산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전라남도가 제1회 마한행사 때 내건 슬로건이 ‘동아시아 해상왕국 마한’이었다. 해상왕국 표현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당시로 보면 엄청난 해상세력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해상교역을 통한 인적, 물적 교류의 중심지가 바로 영암이다. 이러한 영암 마한의 특성이 이번 전라남도 마한행사의 주제에 오롯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영암 마한이 지닌 지정학적 특성을 새삼 정리함으로써 그 의미를 새기고자 한다.

마한의 대외 교역로
마한의 대외 교역로

인적·물적 교류의 중심지 

영암은 대한민국 남해를 지키는 해군 제3함대 사령부가 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한 이래 이 지역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가 커다란 변동 없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영암이 고대부터 고유의 전통문화에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게 된 것은 영산 지중해의 열린 남해만의 입구에 있는 지정학적인 여건 때문이다. 영암은 고대부터 중국, 일본, 가야, 동남아시아와 활발한 교류를 한 국제항이 여럿 있었다. 

영산강 하류에는 일명 ‘남해만’과 ‘덕진만’이라고 불리는 넓은 만이 형성되어 있었다. 결빙이 안 되고, 상·하류 강바닥의 높낮이 차이가 크지 않아 유속이 느리며 조수의 영향을 받아 뱃길로서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영산강의 하류는, 썰물 시 갯벌과 갯고랑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서해안 바다로, ‘남해만’이라 칭하던 내만(內灣)이 형성되어 그곳을 중심으로 많은 항·포구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영산강 중류는 조수가 영향을 미쳤던 구간으로 강상(江上) 포구가 존재하였다. 조수에 따른 감조 상·하한은 나주대교 기준 상하 5㎞, 즉 만봉천 합류 지점-원가 마을에 이른다. 다시들 일대의 중심 항구였던 회진까지도 대형 선박(海船)들이 다니는 뱃길이 열려 있었다. 문헌 기록으로 보면 해선들이 영산창 일대까지 올라온 것이 확인되고 있다. 게다가 다른 내륙의 평야와 달리 하천 부유물과 퇴적물 유입이 증가함으로써 하상보다 높아져 조수(潮水)의 영향을 받지 않은 비옥한 노출 간석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이 간석지를 토대로 형성된 비옥한 토지는 이곳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하였다.
 
연안 항로의 주요 교역로

남해포가 있는 시종 지역의 풍수는 낙지 형국으로 발가락 사이는 조수(潮水) 구간의 골이었다. 갯골을 따라 배 닿기 쉬운 곳은 포구가 설치되고, 부근 둔덕 밑에는 큰 동네가 형성되었다. 시종 관내에 100기가 넘는 고가(古家)들의 분포로 보아 고대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졌다. 삼포강 유역은 영산 지중해 내해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꼽을만하다. 구석기 유적부터 간석지 개간까지 오랜 기간 선인들의 삶을 살필 수 있는 곳으로 영산강의 축소판과 같다. 이곳은 영산 지중해 중에서도 깊숙한 위치로 주변 땅이 유수의 침식에 약한 붉은 색 황토 풍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다른 곳보다 빨리 매립되어 이미 서기 전에 비옥한 평야와 갯골이 형성되었던 삼포강 만(灣)은 하류 쪽으로의 흙모래의 이동이 계속되어 들이 넓어졌다. 이 지역은 한편으로는 갯물의 유입도 이루어져 갯골 사이로는 배들의 출입이 가능하여 주변 지역인 영산 지중해는 물론 서남해까지의 연결이 가능했다. 

한반도 서해는 해류가 미약한 대신 조류가 발달하였고, 남해에서는 외해에서 해류가, 해안 부근에서는 조류가 강하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대방에서 왜에 이르는 항로가 (낙랑·대방)군→서해안→한국(韓國)→남해안→구야한국(가야)→대마도→왜라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낙랑과 대방이 변한에서 철을 수입하였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서남해의 연안 항로가 주요한 교역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서남해 연안 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데다 영산 지중해의 초입에 위치한 영암은 일찍부터 항구가 발달했다. 그 가운데도 덕진, 상대포, 남해포가 주목된다.

장흥창(長興倉)과 덕진 나루

영암이 월출산의 북녘인데도 읍 터로 꾸며진 것은 덕진만이 열려 있어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라 한다. 영암천 유역의 들은 해발고도가 10m 미만으로 질펀하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조수(潮水)가 도달하여 수심이 3m나 되는 바닷길이 형성되었다. 

덕진이 중요한 항구였다는 것은 고려 때 덕진만에 국가에 세곡을 모아 바치는 조운창이 설치되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 영산강 유역에 2개의 조창이 있었는데, 나주 해릉창(海陵倉)과 영암 장흥창(長興倉)이 그것이다. 장흥창은 단순한 창고가 아니라 행정구획의 하나로서 독자적인 영역과 치소(治所)가 있었다. 덕진 나루와 해창교 사이에 해당하는 군서면 원해창 마을이 장흥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덕진은 영암은 물론 강진, 해남, 장흥 등지의 상인이 몰려들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암의 문호이자 외항의 역할을 하였다. 

덕진만은 월출산과 주변 산등성에서 흘러 내려온 토사로 점차 매립되어 수심이 얕아지자 다리가 놓였다. 덕진면 내촌마을 영암천 변에는 대석교창주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라고 하여 높이 150cm, 너비 62cm 크기의 빗돌이 비각 속에 있다. 이 돌비는 덕진 여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13년 건립되었다. 원래 큰 나루라는 의미를 지닌 지명인 덕진은, 목포로부터 뱃길이 닿는 포구지만, 영암과 나주를 왕래하는 곳으로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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