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영암출신 인사 6명이 독립유공자에 추서됐다. 이들은 1930년대 영암에서 일어난 전국 최대 규모의 농민운동인 이른바 ‘영보 형제봉 만세 사건’(영암농민항일운동)에 연루된 인사들이다. 지난해는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건국포장 1명, 애족장 1명, 대통령 표창 23명, 그리고 이에 앞선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2명 등 모두 27명이 서훈을 받았다. 이로써 2018년 6명, 2019년 3명, 2020년 4명, 2021년 27명, 그리고 올해 6명 등 ‘영보 형제봉 만세 사건’에 참여했던 74명 중 60여 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단일사건으로는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일찍이 영암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선각자들이 무수히 많았다. 임진왜란 때부터 수많은 영암 출신들이 국난극복에 몸을 던졌는데 도포출신 양달사가 조선시대 ‘최초 의병장’의 역사를 썼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거쳐 정유재란 때는 서호면의 전몽성·몽진 형제가 있었다. 한말 때는 영암출신 의병이 190명에 이른다.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한 의병장도 20명 남짓이나 된다. 구한말 금정면에서 태어나 의롭게 생을 마감한 조선 최초의 홍일점 의병 양방매 여사도 그 중 한 명이다.한 지역에서 이처럼 많은 의병장을 배출된 지역은 없다고 연구자들은 밝히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숨은 주역 가운데 우리 고장 구림 출신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에 유학 중이던 최규창, 최규성, 최규문, 최상호(광주사범) 학생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영암 의병’의 빛나는 업적은 1919년 구림과 영암읍에서 일어난 3·1독립 만세운동, 영암농민항일운동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견해다. 영암을 ‘의향’(義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역사학자 박해현 교수(초당대)는 “영산 지중해 초입에 있는 영암의 지리적 위치가 마한시대 이전부터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영암의 정체성’으로 발현됐다”고 말한다.

마한의 심장 영암, 그 후예들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이번 광복절을 맞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이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도록 기념사업이 조속히 이뤄지는 것도 후세의 몫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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