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중 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수필가
신 중 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수필가

출근 시간에 빠른 길을 선택하여 영암을 가려면 송정리 극락천 둑길을 통해 곡예 운전을 해야 한다. 묵주기도를 드리며, 아내와 함께 음악을 듣기도 하고, 마음에 묶인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며 신나게 달리다 보면 벌써 월출산은 우리를 반긴다. 요즈음은 한국전쟁 때의 피해 사실을 증언자에게 듣고 녹음하고, 녹취하여 ‘구술사’ 책자를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올해 아흔이 된, H선배님이 한국전쟁 당시 W단체장 삼촌 두 분이 빨치산에 가입하여 활동했을 것으로 간주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그날 비참함을 생생하게 실토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반송정 마을이었다. 꼬불꼬불한 산골길, 활성산과 월출산, 장흥 유치마을들과 맞닿아서 산허리에 장대를 걸칠 수 있는 마을이었다. 산 공기가 상쾌했다. 마을 정각은 깔끔하여 무더위에 흐르는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몇 분의 어른들이 여유롭게 쉬고 계셨다. 만나기로 약속한 K어른은 “저의 숙부님이 희생되셨는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단을 만나 두 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어요”라고 말하며 다시 우리에게 증언했다. 

거기에서 다시 삼호읍 망산 마을로 가는 길목에 묵동마을 위의 저수지에 물이 반쯤 찬 반가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몇 주 전에는 저수지 수로를 수리하다가 저수지 물이 바닥이 나서 묵동마을 앞 논바닥은 천수답(天水畓)이 되어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금이 가 있었다. 벼들이 말라 죽으니 마을에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전남은 영산강 물을 끌어와 농수로 쓰기 때문에 지금은 천수답이 없는데 이곳 논바닥은 그렇지 못했다. 오죽하면 기우제까지 올렸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단비가 내려 목말라 말라가던 벼들도 겨우 살아나 갈증을 풀고 무럭무럭 자라 풍성한 가을을 부모·형제를 잃고 진실이 규명되기를 학수고대하며 몸져누운 H할머니에게 안겨 줄 것만 같다.

망산에서 K형님을 만나고, 도로변에서 옥수수를 팔고 있던 한 유족은 “처가의 장인, 처남 세 명과 마을 희생자 네 명, 모두 여덟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었는데, 보도연맹 가입자로 오해를 받고 잡혀갔습니다. 예비검속 때에 미처 해명하지 못하고 어느 산천에서 사살되어 겨우 시신만을 거두어 매장하였고, 한 날 제사를 모셨습니다. 하루빨리 진실을 규명하여 실추된 명예가 회복되고, 배·보상이 이뤄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라고 증언했다.

저녁에는 금호동 성당 성모님 모임 월례회 방문을 하러 저녁 미사에 참례했다. 복음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이었다.

신부님은 강론으로 부지런한 농부의 이야기를 하셨다. ‘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라고 했다. 최근에 나는 바쁘다고 주말농장에 자주 가지 않았더니 도랑에 잡초가 내 키를 넘게 자랐다. 미처 따지 못한 고추의 무게로 고추 가지가 부러지고, 비바람에 넘어졌다. 이렇게 풀을 뽑지 않고 정성껏 기르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부님은 “아무리 부지런한 농부여도 좋은 땅을 만들지 않으면 좋은 곡식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특히, 벼농사에서는 물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막도 처음에는 옥토였으나 물 관리를 잘 못 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하늘만 쳐다보면 천수답이 됩니다. 우리 마음의 천수답에 물을 끌어 오듯, 세속에 찌들인 마음을 정화하고 다스리는 기회를 자주 얻어서 마음의 옥토를 만드세요.”라고 했다.

오늘처럼 유족들을 만나 억울한 한을 푸는 일을 하다가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웠었는데 신부님 말씀을 듣고, ‘내 마음을 달래고 다스리자. 어떠한 시련이 오고 폭풍우가 몰아쳐도, 슬기롭게 이겨내자. 우린 영원히 묻힐 슬픈 과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가(史家)가 아닌가’라고 다짐했다.

월례회에 참여하여 60여 명 레지오 단원들에게 “제 찌든 천수답 마음에 신부님의 말씀에 큰 위안으로 삼았습니다”라고 방문 인사말을 했다. 기러기는 V자로 나르므로 70%의 힘을 절약한다고 한다. 맨 선두의 리더를 따라 목적지에 도달하며, 늘 리더에게 ‘끼욱끼욱’ 응원을 보낸다니 동료애가 대단한 새다. 100년을 사는 동안 짝이 먼저 죽더라도 다른 짝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구혼식(舊婚式)에서 기러기를 들고 사랑을 맹세했나 본다. 단원들이 성모님 군단으로서 기러기처럼 변함없이 노력하고, ‘마음의 천수답’에 좋은 영양분을 채워 가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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