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는 백포만 일원의 송지면 군곡리 패총과 현산면 읍호리 고분군, 삼산천 일원의 원진리 옹관 고분군, 옥천 만의총 고분군, 북일면 일원의 북일 고분군 등 지석묘, 고분, 패총 등 이 다수 분포해 있다. 해남반도는 마한시기 해양문화의 요충지이자 중심지로 확인되면서 해남군이 체계적인 마한역사 복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은 군곡리 패총 유물(사진 왼쪽)과 용두리 고분출토 유물.
해남에는 백포만 일원의 송지면 군곡리 패총과 현산면 읍호리 고분군, 삼산천 일원의 원진리 옹관 고분군, 옥천 만의총 고분군, 북일면 일원의 북일 고분군 등 지석묘, 고분, 패총 등 이 다수 분포해 있다. 해남반도는 마한시기 해양문화의 요충지이자 중심지로 확인되면서 해남군이 체계적인 마한역사 복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은 군곡리 패총 유물(사진 왼쪽)과 용두리 고분출토 유물.

최근 전라남도는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 80명을 발굴해 서훈 신청을 하였다고 하였다. 필자가 번역한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3·1운동’이 이러한 뜻깊은 사업의 토대가 된 듯하여 보람있게 생각한다. 판결문 번역사업은 현 영암군수인 우승희·문행주(화순)·신민호(순천) 전남도의원, 광주광역시의회 김동찬 의장과 김나윤 의원의 전폭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80명 가운데 영암 출신이 9명으로 15명인 해남 다음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영암의 3·1운동은 영암읍에서는 계획대로 추진되지는 못하였지만 구림에서는 영암의 자존심을 크게 폭발하였다. 하지만 위대한 3·1운동을 정리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빛나는 영암의 3·1운동은 누락되어 있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영암 출신으로 3·1운동에 참여하다 재판에 넘겨진 인물이 28명이었다.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을 받은 영암출신은 13명이었다. 곧 15명이 미서훈 상태에 있었다. 이 중에 이번 전라남도에서 추천한 9명이 포함된 것이다. 영암 출신이 많이 발굴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아직도 미서훈 상태에 있는 인물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조사가 이뤄져 이들의 공로가 빛나기를 바란다. 특히 영암은 위대한 의병 전쟁의 중심지로 많은 영암인이 쓰러졌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실태조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이들에 대한 서훈도 미약하다. 이들을 전수조사하여 그 공적을 밝혀내는 일은 후세인의 몫이다. 

‘마한’ 경쟁에 나선 자치단체들

마한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전남 마한 중심지로 나주와 영암, 그리고 해남반도에 있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에 더하여 보성강 유역과 섬진강 유역의 마한도 중요한 정치체가 있었다고 믿는다. 보성 복내 지역에 마한의 중심국가 비리국이 있었다. 이곳에 백제 멸망 후에 당의 도독부 산하 치소가 있었다. 이곳이 마한 이래 백제 멸망 당시까지도 변함없이 세력 거점임을 말해준다. 보성강은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의 보고이다. 게다가 전국 최대의 고인돌 분포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구석기–청동기–철기(마한)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맥락이 나타난 역사의 고장이라 하겠다. 이를 그 지역의 정체성으로 삼아 지역발전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최근 역사문화자원 관련 특별법을 계기로 고대 마한에 속한 여러 지역에서 마한을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충북 청주에서조차 ‘마한 청주’를 이야기 하고 있다. 전북도 마찬가지이다. 2021년까지 주창했던 ‘전북 가야사’는 쑥 들어가고 2022년 봄부터 ‘전북 마한사’ 운운하고 있다. 전북도민들이 볼 때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광주 신창동 유적이라는 확실한 마한의 유적이 있음에도 특별법 통과될 때 무관심하였던 광주광역시도 2022년에 들어서서 부산을 떨고 있다. 역사문화자원 특별법은 기초자치단체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여러 곳에서 역사문화자원을 정비, 활용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전남의 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활발히 마한사에 관심을 표명한 지역이 해남군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통계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최근 4년간 전남의 마한역사문화권 12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총 45건의 마한 유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해남군이 14건으로 가장 많은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군곡리 패총을 비롯하여 만의총 고분군, 월송리 조산고분, 용두리 고분, 방산리 장고봉 고분 등 주요 고분군이 발굴 조사되었다. 특히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군곡리 패총은 무려 7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유적이 지닌 가치가 새롭게 부각이 되고 있다. 군곡리 패총이 있는 해남의 백포만 일대는 2년에 걸친 발굴조사로 해남의 마한 역사를 새롭게 살피는 계기를 마련된 읍호리 고분군 등 많은 마한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이곳이 필자가 설정한 마한 남부연맹의 대국 침미다례(신미국)의 세력이 있었던 곳임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2022년 6월 초, 해남군에서는 백포만 일대가 지닌 역사적 위치를 ‘해남 현산에 깃든 마한소국’이라는 국제학술세미나를 통해 새롭게 조명하였다. 이미 본란을 통해 이 세미나의 의미와 한계를 간단히 소개한 바 있다. 

작년에 읍호리 발굴조사 현장을 다녀온 전남도 문화자원과 김진영 선생은 필자에게 백포만이 지닌 경관에 감탄하였다고 하며 꼭 한번 답사를 해 볼 것을 권하였다. 마침 전남 역사교사들의 마한답사 책임을 맡은 필자는 읍호리 현장을 찾아갈 수 있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도 버스에 30명 가까운 교사를 싣고 들어가니 마을회관 앞에서 70대 청년회장 어르신이 화를 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동네가 필자와 같은 함양박씨 집성촌이어서 이장님의 안내로 읍호리 고분 현장을 살필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중계 기항지 적 성격의 백포만

백포만은 1930에 진행된 백포만 방조제 사업으로 인해 주변이 간척지로 바뀌면서 과거 바다로 통하던 포구 문화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 송지, 현산 일대는 어촌이었다. 일제 때 월송리 금강마을 인근에 포구가 있어 목포를 오가고, 구산천 물길을 따라 역시 선박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인근 백방포는 중국과 제주를 왕래하는 중요한 포구였다. 

백포만은 서해안과 남해안을 연결 짓는 해로상의 결절점이었다. 울돌목을 통과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장소였다. 고대 연안항로의 상황으로 유리한 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포만은 지리적인 위치에서 중요한 중계 기항지 적 성격 때문에 이곳의 중요성이 높이 부각되었을 법하다. 잘 알다시피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당시 연안항로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지금의 황해도에 해당하는 대방군에서 출발하여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해안을 지나 지금의 김해–대마도–이끼섬–사가현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설명되어 있다. 물론 이 항로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항구에 기항하였는지 하는 언급은 없으나 항로를 통해 개략적으로 추정은 가능하다. 

필자는 전남의 중요한 기항지로 영암 시종의 남해포, 백포만, 보성 득량만, 여수반도 등을 상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백포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서해에서 남해로 바뀌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백포만이 지닌 지리적 위치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는 대표적 유적이 군곡리 패총이다. 기원전 2세기에서 5세기까지 형성된 군곡리 패총 유적에서 주거지, 제사유적이 확인되고, 중국·가야·왜 등의 여러 나라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곳이 대표적 기항지였음을 생각하게 한다. 흔히 고대 선박과 항해술로 연안항로를 지날 때는 변화되는 지형지물에 대한 정보 계절과 급변하는 해양성 날씨에 대응할 수 있는 정박 장소, 항해에 적합한 물때를 기다리면서 머무를 수 있는 숙박시설, 항해 시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공급할 수 있는 물류 공급지,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제사 공간에 이르기까지 고려할 사항들이 다수이다. 군곡리 유적은 위의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영산 지중해의 중심부에 위치한 남해포와 비교하게 한다. 백포만은 단순한 기항지 뿐만 아니라 중개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이를 통해 축적된 부가 고구려와 독자적 외교를 통해 백제를 견제하려 했던 마한 남부연맹 대국으로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마한 역사문화자원 십분 활용해야

해남군은 백포만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자원을 정비하여 해남의 정체성을 찾고 지역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나주시에 이어 군에 마한팀이라는 행정조직까지 만들고 국립마한센터 유치 운동 등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마한 역사 유산이 어느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암군도 전국 최초로 마한축제를 개최하여 마한 관심을 제고시켰고, 여러 차례 학술세미나를 통해 이 지역이 지닌 역사적 성격을 밝혀내 국내외적으로 그 가치를 확인하였다. 최근 발굴된 쌍무덤을 국가사적으로 지정하는 신청서가 문화재청 최종 심사 단계에 있는 등 마한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하려는 준비를 차근차근하였다. 이러한 준비가 어느 지역보다 국립마한센터 유치의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하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지역주민들의 뜨거운 애정과 관심이 아닐까 싶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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