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철 / 군서면 모정리 출생 /전 현대택배(주) 전무이사 / 전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 심사위원
신순철 / 군서면 모정리 출생 /전 현대택배(주) 전무이사 / 전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 심사위원

60년대 필자의 중학교 시절, 보리 베고 모심는 오뉴월 농번기 때가 되면 방학을 해서 집안일을 돕도록 했다. 그때 그 시절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온 나라가 새마을운동으로 농가 소득증대를 위해 힘썼다. 정부에서는 비료공장을 세우고 농약 살포와 영농 재배기술을 보급하며 벼 종자를 개량하고 통일벼 심기를 권장하여 벼수확 배가운동을 전개했다.

우리 집은 열 대여섯 마지기(3,200여평) 농사를 지어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아버지, 어머니와 여섯 형제자매 등 10여 명의 식구들이 근근히 살아갈 수 있는 소농의 집안이었다.

어머니 솔안댁의 하루는 날마다 새벽 동트기 전부터 시작된다. 첫 닭이 우는소리에 깨어 일어나 공동우물(아랫마을 논 가운데 있었음)에서 샘물을 퍼서 식수용으로 한 동이 머리에 이고 오신다. 제일 먼저 장독대 앞에 한 사발 떠놓고 자식들 잘되게 해달라고 일년 열두 달 삼신령께 빌고 또 간절히 염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모심는 날에는 온 식구가 동원된다. 우리 집 모심기하는 날, 어머니는 보리쌀을 두 번 삶아 쌀을 섞어 밥을 지어서 할아버지 밥상, 또 할머니와 애기들 밥상을 따로 차려놓고 별도 새참으로 먹을 쌀밥과 반찬, 막걸리 등을 준비하여 아버지가 지고 갈 바지게 위에 올려놓는다.

서신 채로 대충대충 아침 식사를 떼운 후 몸빼(여자들이 일할 때 입는 통바지)로 갈아입고 해 뜨기 전에 서둘러 못자리 논으로 달려 나간다. 품앗이해 둔 모내기 일꾼들은 벌써 못자리 논에 모여 모판에서 30㎝ 가량 자란 어린 모를 손으로 뽑아서 짚으로 묶고 있다. 아버지는 짚으로 묶은 모타래의 물을 빼서 운반하기 좋게 논둑에 건져 놓는다. 장정들과 함께 물 빠진 모를 지게에 지고 가서 모내기할 논 군데군데 한 묶음씩 적당한 간격으로 던져 놓는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라 모심기 시작하기 전에 준비해 간 새참을 먹기 위해 모두들 논두렁에 둘러 앉는다. 부근 논에서 쟁기질하는 아저씨, 논에 물을 대러 나오신 어른들도 오시라고 손짓한다. 모두 함께 새참을 곁들여 막걸리 한 사발씩 쭈욱 들어 마시며 올해의 풍년을 기원한다. 그 참에 못줄을 잡기 위해 할아버지도 나오셔서 막걸리 한 순배씩을 더 권하신다.

필자도 아침부터 아버지 따라 모판에서 모를 건져 논둑으로 나르다가 거머리에 물려 징그러워 혼쭐이 났지만 쌀밥과 갓김치, 감자를 넣어 졸인 고등어 새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모꾼들은 못줄에 맞춰 모를 심는데 할아버지와 중학생인 필자가 논 양쪽 논두렁에서 작대기에 맨 못줄을 잡는다. 할아버지의 "아이~ !" 하는 호령 소리에 맞춰 "예이~!" 하며 못줄을 잡고 옮기다 보니 어느새 물 논에 어린 모가 파랗게 출렁거리고, 금방 점심 때가 되어 특별히 작은어머니 대월댁이 푸짐한 점심을 챙겨 나오신다.

모두들 힘들고 허기진 참에 논두렁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맛나게 잘 먹고 대월댁 칭찬으로 왁자지껄 한바탕 떠들썩하다. 모꾼들의 모심는 속도가 느려지고 온몸이 나른해져 누군가가 "어헤야 상사디여~!" 를 구성지게 선창하면 "웃동네 노처녀는 올가을에 시집간다네.~!" 하고 목청껏 따라 부른다. 해질 무렵이 되면 바쁜 손놀림으로 모심기를 마무리하고 지쳐있는 발걸음은 총총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모심기는 주로 품앗이를 하는데 서로 상의하고 협력하여 날자 별로 먼저 심기도 하고 늦게 심기도 한다.

아버지는 품앗이 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어머니 솔안댁은 품앗이 하는데 인기가 좋아 우리집 모심기는 비교적 먼저하고 어머니는 6월 내내 품앗이 갚으러 다니셨다. 품앗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시면 평소보다 힘들고 지친 몸이었지만 대가족 식사와 설거지, 밀린 빨래를 하시고 끙끙대며 무더운 작은 골방에 들어와서도 쉴 수가 없었다.

벌겋게 땀띠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문질러 비벼대며 어린 자식들 잠자리를 보살피시고 윙윙거리는 모기떼들을 부채로 쫓아내고 다니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날마다 힘들고 고달픈 생활을 온몸으로 감내하고 이겨내신 어머님의 희생과 사랑이 칠순 중반을 넘어선 이 나이에 더욱 간절하게 그리워지고 한없이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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