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중 /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 전남에너지고 교사
김기중 /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 전남에너지고 교사

신참 시절에 첫 휴가를 학수고대했었다. 하루하루 고단함을 늘 휴가를 간다는 희망이 달래주었다. 휴가일이 가까워질수록 기대는 더욱 부풀어 갔다. 드디어 휴가 당일 병영을 벗어나 맞은 첫 기착지 춘천의 어느 선술집 첫잔의 취기에 행복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어지는 가족·친구들과의 재회, 맛있는 먹거리와 이야기꽃, 그렇게 즐거운 시간들이 채워지자 이제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불안감 또한 하루하루 귀대 날짜가 다가올수록 점점 커졌다. 결국 귀대 신고식을 마치고 다시 식판을 옆구리에 끼고 줄지어 취사장으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사그라들었다. 굳이 군대 시절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당시의 행복감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학창 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 운동경기에서의 승리, 아니면 뜻하지 않은 횡재 등을 통해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깨닫게 된다. 어떤 사건(event)이나 외적 요인을 통해 주어지는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벽 빗방울 소리에 잠이 깼다. 폭염을 견디며 고대해 왔던 터라 미복 차림 설레는 마음으로 어슴새벽 현관 마당으로 향한다. 후드득후드득, 새벽 장맛비에 맞추어 희뿌연 먼지로 타들어가던 흙들이 일제히 춤을 춘다. 흙의 향연에 동참하며 비로소 농부임을 실감한다. 농부에게 있어 흙은 공기와도 같은 존재이자 멋진 파트너다. 그런 흙과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행복하다. 무엇보다 단단한 흙덩어리를 입자 상태로 잘게 부수는 일이 일상화되었으니 이 또한 취미라면 취미이겠다. 뭉쳐있는 흙덩어리를 잘게 부수는 작업은 마치 하루 또는 한 주일 동안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굳어지고 닫혀진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즐거운 노동이다. 그것은 ‘어린왕자’가 자신의 소행성에 두고 온 꽃을 생각하듯이 그 흙을 보금자리 삼아 발아할 어린 씨앗을 배려하는 소소한 행복이다. 그것은 또한 다시 돌아가서 그 꽃에 물을 주고 유리 덮개를 씌워 주고픈 ‘어린왕자’의 소행성처럼,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일희일비하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할 소확행의 든든한 베이스캠프이다. 그러니 진정한 행복이란 무언가를 얻음으로써 주어지기보다는 내적 충만함을 늘 간직한 상태로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가는 일이다. 바로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영역이다.

며칠 전 ‘필즈상’을 수상한 한국계 수학자 허준이 교수의 모습에서 일상의 행복감이 묻어났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수학의 노벨상이라 일컬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할 정도면 하루 몇 시간 정도 연구에 몰두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4시간 정도’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특별한 취미가 없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보낸다’며 ‘주로 청소나 빨래 설거지 등 가사(家事)를 즐긴다’고 덧붙였다. 바로 가사와 학습을 구분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함께 해 왔다는 의미일진데, 저명한 수학자라면 일상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했을 거라는 통념에서 보자면 의외일 수도 있겠다. 특히 빠르게 문제 풀이를 누가 더 잘하느냐를 평가하는 한국의 입시(교육) 풍토에서 보자면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학창 시절 시 쓰기와 물리학 연구 등 순수학문에 탐닉했던 경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간학문(間學問)적인 경험이 오히려 전공 분야를 지치지 않고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는 자양분이자 기초 체력이 되어 준 셈이다. 그는 귀국 후 한 방송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시청자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건강한 마음으로 꾸준히 즐겁게 공부하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는데,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 조언이야말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학업에 정진하는 젊은이들과 만학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칭 수포(수학포기)자, 영포(영어포기)자들은 늘고 있다. 왜 ‘수포자’, ‘영포자’들이 양산되는가?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경주마에게 눈가리개를 씌우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한 치의 양보도 허용되지 않는 레이스에서 자신보다 앞서가는 말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옆에서 달리는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앞만 보고 질주하라는 배려(?)일텐데, 이는 아마도 저만치 앞서가는 양쪽 말들을 보는 순간 급격히 사기가 떨어지면서 포기하고 싶은 심리가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쟁교육 풍토야말로 경주마들이 벌이는 레이스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사교육이 됐건, 선행학습이 됐건, 어떤 식으로든지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 속도전을 펼친다. 이 속도전에서 앞서가지 못하는 사춘기 예민한 청소년들은 교실이나 학원 현장에서의 상대적 좌절감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수포·영포자를 자처하며 공부에서 멀어지게 되고 그것이 오히려 자신들의 자존감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탐구의 길은 인간만이 부여받은 하늘의 선물이며 각자가 긴 안목으로 즐겁게 갈 수 있는 일상의 행복한 여정이다. 그러나 이 여정의 출발선이라 할 수 있는 학교교육에서부터 이를 깨닫고 즐겁게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봉쇄하고 있다면 이 또한 행복추구권 침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더이상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이제는 교육을 점수와 서열의 틀 속에 가둬둔 채 악순환을 확대 재생산하는 철옹성 같은 제도를 바꿔내야 한다. 바로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서열화된 대학 시스템과 입시경쟁 교육을 철폐하고 ‘지역연합대학’과 ‘대학통합네트워크’ 등의 방식을 통한 ‘대학 평준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제는 중앙·지방정부와 의회, 교육·시민·사회단체와 노조, 교원, 학생, 학부모 등 범국민적 의견을 수렴하는 사회적 담론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상술하자면, 공동선발·공동학위제를 근간으로 한 대학통합체제 구축, 수능 절대평가 및 대입 자격고사화 도입, 대학무상화 실현을 위한 관련 법률 정비 등을 힘있게 추진해야 한다. 바로 위기에 처한 지방대학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제2, 제3의 ‘허준이’가 계속 나오도록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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