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대성동 고분 박물관  / 가야, 신라, 백제는 중요 유적에 시·군 박물관이 많이 건립되어 있다. 하지만 마한 역사문화권이 있는 광주·전남에는 국립나주박물관 및 복암리 전시관 뿐이다.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영암 시종에는 고분 전시관이 없다.
김해 대성동 고분 박물관  / 가야, 신라, 백제는 중요 유적에 시·군 박물관이 많이 건립되어 있다. 하지만 마한 역사문화권이 있는 광주·전남에는 국립나주박물관 및 복암리 전시관 뿐이다.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영암 시종에는 고분 전시관이 없다.

민선 8기 ‘혁신 영암’을 슬로건으로 내건 우승희 군수가 7월 1일 취임했다. 우승희 군수는 누구보다 역사·문화에 관심이 많다. 도의원 시절 많은 조례를 발의·제정했다. 대표적인 조례로, 전라남도의 미래유산을 보존 활용하려는 ‘남도 미래유산 보존 및 활용’에 관한 것이 있다. 전남 지역의 문화유산을 보존 관리하고, 나아가 지역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취지에서 제정되었다. 2021년 조례에 따라 추진된 ‘남도 미래유산 보존 및 활용 기본계획’이라는 용역을 필자가 책임을 맡아 수행 중이다. 우연이다. 

우승희 군수는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찾아 그들의 생계 지원책까지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까지 추진하였다. 우연의 일치로 그 용역까지 필자가 수행하여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18인’이라는 책을 펴낼 수 있었다. 구술을 통해 일본만이 아닌 국내로도 강제동원이 많이 이루어졌고, 영암, 해남, 나주, 강진, 진도 등 서남부 지역 출신들이 많이 끌려갔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우승희 군수는 필자와 더불어 여러 차례 방송에 나가 마한의 중요성을 앞장서 설파하였고, 특히 ‘마한 특별법’ 제정에 전임 전동평 군수와 더불어 앞장섰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인 E.H. Carr가 역사란 ‘우연’과 ‘필연’의 연속이라 하였지만, 마침 7월 1일이 군수 취임일이어서 역사와 문화를 누구보다 사랑한 군수와의 인연을 언급했다.

영암인의 항일의식과 정체성 

필자가 본지에 마한을 중심으로 꽤 오랫동안 글을 통해 영암군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정말 ‘우연’이었다. 그 ‘우연’이 계기가 되어 내 고향보다 영암을 사랑하고, 알려고 하고 있다. 며칠 전 광주·전남 지역에서 최고의 한학자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안동교 박사(현 한국학호남진흥원 자료부장)를 만났다. 그는 필자와 같은 보성 출신인데, 보성 함양박씨의 원래 뿌리가 영암 구림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여 주었다. 영암 구림에서 화순을 거쳐 보성 우리 동네로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원래 고향은 영암 구림이라 하겠다. 작년 10월 전남교육청 마한 답사단 교사 일행과 함께 최근 마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열린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를 찾았다가 그곳이 함양박씨 집성촌이라는 사실을 알고 반가웠다. 역시 ‘함박’인 이장에게 원 고향을 물으니 영암 구림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구림의 함양박씨가 광주전남의 박씨 본향이 아닌가 한다. 언제 시간을 내어 차분히 살피려 한다.

지난 주말 서울 출장을 갔다. 열차 안에서 영암 출신으로 영보 농민운동을 이끌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해방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및 ‘민전’에서 활동을 하며 좌·우를 넘나들며 통일 조국을 수립하려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유혁 선생의 글을 읽었다. 필자는 광주전남 학생운동 판결문을 번역하다 영암출신 학생운동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영보 농민운동의 주역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왔거나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친일의 길을 선택하였으나 완도 소안도 출신들은 한결같이 항일의 길을 선택하였다. 필자는 영암의 학생운동 주역들이 영보 농민운동 주동세력으로 새롭게 변하는 것에 깊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왜 영암 출신 지식인들은 그들의 편안한 삶보다 조국 독립의 길에 목숨을 쉽게 내던진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였다. 한말 전남 중남부를 호령한 의병부대인 ‘호남의소’의 핵심이 영암인들이었다. 1919년 구림 3·1운동은 실로 대단한 규모였다. 이러한 항일의식은 영암인의 자랑스런 정체성의 표출이었다.

필자는 영암출신 오수열 교수가 정리한 유혁 선생에 대한 논문과 선생의 장손인 유수택이 쓴 ‘할아버님 영전에’라는 글을 읽었다. 특히 장손의 글은 눈물 없이는 차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애절하였다.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 해방직후 좌,우 갈등과 혼란, 상대를 죽이는 데 동원된 ‘친일’과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그로 인한 갈등으로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가는 그 비극의 중심 현장인 영암인들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필자는 최근 ‘독립운동가 의사 김범수 연구’, ‘강석봉 평전’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나 ‘빨갱이’라는 공격에 무너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을 시킨 바 있다. 이 과정에 조극환, 유혁 등 영암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암이 고대 마한에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심 무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곳곳에 흩어진 영암출토 유물

이러한 영암 정체성의 시작은 마한이었다. 시종 일대가 마한 문명의 중심지이자 발상지였다는 사실은 고고학적 유물이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영암 어느 곳에서도 영암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을 만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영암의 마한 실체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밖에 없다. 

다른 지역 학자조차 ‘마한역사문화의 정립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보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중국기록에 ‘마한’을 ‘한’이라 불렀다. ‘한’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호의 근원이 되었다. 마한에서 변한·진한이 나오고, 마한인이 변한·진한의 국왕이 되었다고 하는 중국기록을 통해 마한이 한반도 남부역사의 뿌리임을 알려준다. 그 마한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발상지가 바로 영산강 유역 영암·나주 일대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백제 중심의 역사에 갇혀 있었고, 최근에 와서는 가야 중심의 역사에 밀려나고 있다. 참고로 다음 자료를 보도록 하자. <표1>

마한에는 얼마나 투자되었을까? 부끄러워서 생각하기도 싫다. 또 다른 자료를 보도록 하자.<표2>

가야, 신라, 백제는 중요 유적에 시·군 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 하지만 마한 역사문화권이 있는 광주전남에는 국립나주박물관 및 복암리 전시관 뿐이다.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영암 시종에는 고분 전시관이 없다. 영암 출토 유물들이 다른 곳의 수장고에 있다.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된 대표적 영산강식 토기인 ‘조족문토기’도 영암출토 유물이다. 부끄럽지 않은가! 이렇게 우리 문화유산을 우리가 방치하고, 모르고 있다 보니 마한이 ‘백제의 일부’라는 인식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고, 남원 가야사, 순천 가야사에 이어 고흥 가야사, 무등산 가야사까지 주장되고 있다. 곧 마한사는 소멸될 것이라 장담한다. 

대한민국 역사의 뿌리이자 전라도 정체성의 토대가 마한에 있다. 그 중심지가 나주 반남, 영암 시종이다. 영암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는 고분 전시관을 건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가 이미 제안한 바 있지만, 발굴작업을 끝내고 곧 복원공사에 들어가려는 쌍무덤을 영암의 고분 전시관으로 만들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경주 천마총처럼 쌍무덤에서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고분 내부를 전시관으로 활용하면 엄청난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2019년 코로나 이전 국립나주박물관을 찾는 이들이 23만 명이었다. 국립나주박물관 – 쌍무덤 고분 전시관 – 월출산 기찬랜드로 이어지는 역사체험 관광이 이루어진다면, 영암에는 엄청난 경제적 부가가치가 있게 될 것이다. 

필자는 전임 군수에게도 건의한 바 있다. 심지어 전남도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쌍고분의 고분전시관 건립을 얘기하곤 한다. 여론은 환기시키려는 뜻이다. 국·도비를 받아 사업을 시작하려면 시간이 지체되므로, 우선 군비로 사업을 시작한 다음 도비와 국비를 유치하면 좋을 것이다. 올해 사업이 시작되면 내년 말이면 개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타당성 검토 용역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국립마한센터, 전남문화재연구소까지 시종으로 오게 되면 마한역사문화공원은 김해·고령을 능가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역사 관광지로 거듭날 것이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