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18-불교를 일찍 받아들인 영산 지중해 마한(하)

해남 군곡리 유적 / 군곡리 패총은 대표적인 마한 시대의 유적이다. 이곳은 중국 신왕조의 화폐뿐만 아니라 중국·한반도·일본을 연결하는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해남 일대가 고대 국제무역항구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해남 군곡리 유적 / 군곡리 패총은 대표적인 마한 시대의 유적이다. 이곳은 중국 신왕조의 화폐뿐만 아니라 중국·한반도·일본을 연결하는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해남 일대가 고대 국제무역항구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주체적인 마한사 인식 중요하다

최근 해남지역에서는 마한 유산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해남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어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1986년 발굴 확인된 군곡리 패총은 대표적인 마한시대의 유적으로 2003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곳 패총에서는 중국 신왕조의 화폐뿐만 아니라 중국·한반도·일본을 연결하는 외래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해남 백포만 일대가 고대 국제무역항구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해남군은 군곡리 유적을 1986년부터 최근까지 무려 8차에 걸쳐 조사하여 이 지역이 지닌 역사적 위치를 밝히고 있다. 특히 2021년 지표 조사된 현산면 읍호리 고분군이 마한 시기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이 지역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6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해남에서 열린 ‘해남 현산에 깃든 마한 소국’이라는 국제 학술세미나가 대표적 예이다. 

해남반도에는 나주 반남·영암 시종에 있는 내비리국, 나주 복암리에 있는 불미국과 함께 침미다례(중국기록에는 신미국)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필자는 문헌 및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침미다례는 백제의 근초고왕과 맞설 정도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해남반도에 있는 거대한 고분이 이를 설명하고 있고, 자존감이 강한 강진의 정체성도 이 지역이 지닌 마한 정체성의 반영이라 하겠다. 이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정치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왕국’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소국’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현실이 안쓰럽다. 역시 2021년 봄 보물로 지정된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을 ‘마한의 금동신발’이 아닌 ‘백제의 금동신발’이라고 우리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는 현실과 다름이 아니다.
 
마한의 정체성, 지역발전의 토대로 삼아야

6월 22일 삼호읍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 운영회의에 다녀왔다. 삼호읍은 대불산단이 있어 인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작년 겨울 삼호고등학교 학생들과 마한답사를 하면서 살폈더니 학생 대부분이 경상도 등 다른 지역 출신이었다. 이들에게 영암의 정체성 내지는 전라도 정체성을 심어주는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산 지중해 입구에 위치한 영암은 개방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난 호에 이야기한 영산 지중해에 불교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마라난타가 백제보다 마한에 먼저 들어왔다고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그는 마한 어느 지역으로 들어왔을까. 당시 백제 또는 마한은 이미 3세기 후반부터 중국과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침미다례를 포함한 마한 남부연맹 국가들이 중국을 찾아갔다고 하는 사실과 “무제 태강 원년(280)과 2년(281)에 그 主(王)가 자주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7년과 8년, 10년에도 자주 이르렀다. 태희 원년(290)에 동이교위인 하감에게 와서 헌상하였다”라는 진서(晉書) 동이 열전 마한전의 기록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게다가 경제적 교류도 비교적 활발하였다는 것은 군곡리 패총, 수문포 패총 등 침미다례와 내비리국 연맹왕국 영역 안의 유적에서 발굴된 복골 등의 존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이 중국과 왕래하였을 때는 서해를 횡단하는 항로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중심은 당연히 영산 지중해 연안의 항구였을 것이다. 영산 지중해에는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났다고 하는 상대포를 비롯하여 패총유적이 남아 있는 수문포, 그리고 회진포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항구들이 많다. 특히 나주 회진포는 지금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그곳은 일찍이 큰 항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창건 연대 시기가 가장 앞선 불회사가 영산 지중해 지역과 근접한 곳에 있다는 점도 불교가 영산 지중해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한편 마라난타가 불교를 초전 했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서 언급한 대로 마라난타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불교가 영산 지중해 일대에 전래되어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기반 위에 마라난타가 와서 불회사·불갑사 등을 세우며 적극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고, 백제 서울 한성에까지 올라가 백제 불교 공인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백제의 불교는 한강 유역이 아니라 남쪽의 영산강 유역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영산 지중해 지역 연맹체가 새로운 사상의 수용에 포용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 후기 정부나 유학자들의 불교계에 대한 태도가 변한다. 임진왜란 때 불교계 공헌을 인정한 것으로, 불교 정책이 배제에서 포용으로 변화되었다. 18세기 이후 승려들이 호적에 등재되고 사유재산이 인정되면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불사를 이어가려는 분위기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 무렵 전란으로 불탄 건물 등 유적을 복원하려는 노력과 각 사찰의 역사를 기록한 사적기가 간행된다. 불회사나 불갑사의 사적기도 이때 작성됐다. 사적기를 간행할 때 그동안 관리된 문적 또는 새롭게 채록한 내용들을 토대로 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 자체가 전혀 허구라고 말할 수 없다.
 
서해 해로를 타고 한성에 간 마라난타 

불회사 주지인 철인 스님에 따르면, 마라난타가 창건한 사찰로 불회사를 비롯해 영광 불갑사, 담양 용흥사, 군산 불주사, 서울 대성사 등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다. 이 다섯 사찰은 전남에서 마라난타가 한성으로 올라간 길목에 분포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을 거쳐 백제에 들어와 불교가 공인됐다는 것은삼국사기, 해동고승전등 사서에 있어 사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사 권위자인 김두진 국민대 명예교수가 지적한 바 있지만, 마라난타 입국 이전에 이미 영산강 유역 및 영광 일대를 비롯해 마한 여러 곳에 초전 불교가 유입됐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마라난타가 불교를 처음 전래하였다는 일부의 이해는 바로 잡아야 한다. 불갑사 사적기 등에는 384년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칠산 바다를 거쳐 법성포항에 상륙해 불갑사를 최초 창건했고 ‘법성(法聖)’이라는 말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마라난타가 사적기처럼 법성포를 통해 입국한 후 서해안을 따라 한성으로 올라갔을 경우와 백제 수도와 가까운 당항포 쪽 항구에 도착한 다음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한산주에 이른 경우 등을 상정해 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불교 사학자 김복순 교수는 384년 7월 동진에 들어간 사신들과 함께 9월에 귀국한 마라난타가 법성포를 거쳐 한성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불갑사와 불회사를 창건한 후 한성으로 갔다는 내용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이병도의 주장을 따른 것이지만 백제 사신들이 7월에 들어갔다가 9월에 들어왔다는 것은 시간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
 
법성포 불교 초전 설화 재검토해야 

마라난타가 진에서 마한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을 참고할 때, 오히려 미리 입국해 포교 활동을 하다 한성으로 올라갔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겠다. 말하자면 백제 침류왕 초청이 아니라 마한 연맹왕국의 초청으로 들어왔다고 여겨진다. 마라난타가 영광으로 입국했는지는 의문이라는 김두진 교수 의견도 있지만, 저자는 법성포보다는 영산 지중해 포구를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본다. 물론 법성포 이전에 아무포(阿無浦), 부용포(芙蓉浦)라는 불교 관련 명칭이 사용된 것을 보면 이 지역이 불교 유입과 깊은 인연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중국, 왜, 가야 등 외국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였던 국제 무역항들이 즐비한 영산 지중해를 통해 불교사상이 자연스럽게 유입됐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특히 호승 마라난타가 마한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기록 또한 내비리국과 같은 영산 지중해의 연맹왕국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곳으로 입국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때 불교의 특징이 해상을 통해 유입된 남방불교적 성격이라는 점도 가능성을 높여준다. 법성포는 불갑사를 세운 마라난타가 한성으로 왕래할 때 이용한 항구였을 가능성이 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