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중 /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 전남에너지고 교사
김기중 /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 전남에너지고 교사

1967년에 개봉된 이만희(1931~1975) 감독의 영화 ‘망각’은 한 정신과 의사의 진료 기록과 기억상실증 환자의 병상 일기로 전개된다. 지연은 정신병원을 탈출한 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다. 담당 의사 신일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의사, 그녀는 환자다.’ 영화는 지연이 소중히 간직한 네 통의 편지를 찾아낸 신일이 그녀의 과거를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그녀의 과거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 중에서 몇 년 전 자살한 남자가 있었다. 신일은 그 남자의 일기장을 입수하여 지연과 그 남자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신일은 그 사랑이 지연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기고, 그 일기장 속의 남자로 가장하여 지연과 가상의 연애를 시작한다. 지연은 연인과의 첫 만남을 즐겁게 기억한다. 신일의 연기에 힘입어 지연의 과거는 하나둘씩 되살아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신일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지연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뇌한다. 신일과 지연이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사랑을 확인하려는 순간, 죽은 남자의 아버지가 등장하게 되고, 마침내 지연은 기억을 되찾는다. 그러자 신일은 지연의 불행한 과거를 추적하는 여행을 그만두게 되고 두 사람의 위장된 사랑도 끝이 난다.

이렇듯 망각은 양면적이다. 축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지나간 상처들은 ‘망각’의 처방전이 없다면 치유될 수 없다. 아픈 기억을 잊지 못하고 끌어안고만 있다면 우리 각자는 과거라는 울타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망각이야말로, 치매를 제외하곤,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망각이 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밀어내어 정신적 질서와 안정을 찾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확대 적용된다면 이제는 사정이 달라진다. 사회적 망각은 공동체의 질서와 정의를 무너뜨리고 결국 공동체 내 각 구성원들에게 잘못된 인식이나 가치관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비록 잊고 싶은 상처와 아픔일망정 그것이 모두가 함께 공유한 경험이라면 이는 망각의 대상이 아니라 기억하고 계승시켜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굳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날의 사건과 배경을 늘 상기하면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또다시 4월 그날을 보내고 5월 그날을 맞는다. 4.16 세월호와 광주의 5.18, 이 둘은 한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시대적 아픔으로 각인되어 있다. 여전히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이제는 놓아주자’며 망각의 순기능을 부추긴다. 우리 뇌의 해마(hippocampus)를 끊임없이 공격하며 장기기억 저장소를 파괴하고자 시도한다. 그러기 위해 달콤한 새로운 기억 정보들, 이를테면 볼거리, 입을 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 등이 동원된다. 그들이 사회적 망각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개인적인 목적이야 각자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들은 모두 공동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공동체의 질서와 정의가 무너지면 결국 개인들도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 나머지, 사회적 기억이야말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일종의 불안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망각의 처방전이 아니라 기억의 처방전이 필요하다.

효험있는 처방전이 되려면 무엇보다 숫자가 많이 들어 있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 기억 처방전에는 2014년 4월 16일, 304명, 2022년 5월 11일 현재 2,948일째가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5월 광주의 처방전에는 어떤 숫자들을 새겨야 할까? 1980, 5, 17, 18, 20, 21, 27, 245 등을 아로새기면 좋겠다. 1980년 5월 17은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날이었다. 18일은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학생들과 계엄군이 충돌했던 날이었다. 20일은 차량 시위를 계기로 광주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날이었다. 21일은 계엄군이 금남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자행했던 날이었다. 아, 27일 새벽은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상대로 진압작전을 개시했으며, 박영순 씨가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새벽 방송을 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헬기에서 전일빌딩을 향해 난사했던 245발의 M60 기관총 탄흔은 그날의 만행과 아픔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6월 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들의 선거전이 치열하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들은 허수아비 체육관 선거에서 직선제를 쟁취할 수 있도록 투쟁하고 희생하신 모든 분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모든 후보들은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후보시절 했던 약속들을 당선되고 나서도 잊지 말고 지켜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약속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는 다짐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역사학자 전우용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관’이 주도하는 ‘주권’을 ‘민’이 주도하는 것으로 바꾸어내는 것이고 ‘주권자로서 내가 누구인가?’를 성찰하는 것이다. 즉, ‘군(君)’이 성군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민(民)’이 성민이 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이렇게 볼 때 정치적 자유는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으로서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민주적 시민이 지니고 있는 자기 결정권과 이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적 자유 중 어느 하나라도 훼손되는 경우 유지될 수 없다. 정치에 나서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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