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철 / 군서면 모정리 출생 / (주)금호 서울지점장 /  현대그룹 통합물류팀 이사 / (주)현대택배 택배사업본부장(전무이사)
신순철 / 군서면 모정리 출생 / (주)금호 서울지점장 /  현대그룹 통합물류팀 이사 / (주)현대택배 택배사업본부장(전무이사)

필자는 1954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6,25동란으로 불타버린 면사무소 옆 구림국민학교에서 분교된 군서남국민학교가 신설되어 모정리에 터를 닦고 있었다. 입학식은 3월 모정리 광산김씨 문각(사권당) 마당에서 거행되었다. 신입생은 모정리, 양장리, 동호리 등 지남들녁 6개 마을 미취학자 모든 아이들이 대상이었다. 7세부터 전쟁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형 누나 등 서너살 차이가 있었지만 제한없이 함께 입학하여 50여 명으로 1학년 한 반을 편성했다. 교과서는 유네스코 후원으로 무상 받은 책인데 속벽지같은 얇은 회색종이에 인쇄되어 있어서 쉽게 찢기고 갈라졌다. 김씨문각 대청마루에서 기역 니은 디귿~ 한글을 배웠고 123~셈본을 공부했다.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잘 알아 듣지는 못했지만 서투른 글씨 모양을 그리며 썼다가 지우곤했다. 가끔 밖에서 모여 선생님이 "전우야 잘자라" 군가를 선창하면 우리는 다함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따라 부르며 문각 마당을 행진하기도 했다.

날씨가 맑고 포근할때면 광산김씨 제각(선명제)뒤 묘역의 숲속에서 술래잡기 놀이도 하고 잔디밭에 둘러앉아 재미있는 계수나무 달님이야기, 우리국군 아저씨들이 용감하게 싸워이긴 전쟁 이야기 등을 들으며 흥겹게 보내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책보를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3학년이 되어서야 모정 아랫마을 창고에 가마니를 깔고 교실을 꾸몄는데 제법 그럴듯하게 공부하는 느낌이 들었다. 4학년이 되자 미니건물 3칸짜리가 완공되어 처음으로 널찍하고 반듯한 새마루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처음보는 풍금에 맞추어 "나의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등 동요를 배우고 반주에 맞추어 합창도 할 수 있었다. 양철 필통 속에 몽당연필 한 자루와 반쯤 남은 지우개를 넣고 서너권의 책과 함께 보자기에 싸서 책보를 어깨에 메고 학교를 다니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골목골목 온 동네를 줄지어 누비고 다니면서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하고 어렵게 배운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우리마을 뒷동산 건너편에는 서호간척지(학파농장)가 있었다.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배를 타고 떠나간 곳으로 유명한 구림 상대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서호면 성재리에서 군서면 양장리사이 1.2km의 갯벌을 막아 서호간척지가 탄생한 것이다. 넓고 넓은 갯벌 위에 자란 갈대숲과 짠 소금물이 10여년 간 빗물에 씻겨지고 염분이 증발되어 갯벌은 거대한 초원이 되어 있었다. 동네 사람들 틈에 끼여 소꼴을 먹이면서 잔디에 뒹굴기도 하고 메뚜기를 잡아 풀줄기에 꿰어 한 묶음 가져오기도 했다. 여기저기 움푹 패인 웅덩이에는 메기, 피라미, 붕어, 장어 등 다양한 어종들이 모여있어 또래들과 함께 물을 퍼내고 고기를 잡다보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석양 노을이 짙게 물들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때서야 부랴부랴 소를 몰고 집에 돌아오면 온집안 식구들이 걱정하시고 할아버지의 꾸중도 대단하셨다.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 할머님이 지펴놓으신 모깃불이 피어오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허기진 배에 손주가 보리죽 한 사발을 게눈 감추듯 먹은 걸 보시고 할머님이 반사발 더 먹으라고 드시던 죽사발을 건네주시기도 했다. 밤이 깊어지면 어머님 무릎을 베고 누워 북두칠성, 견우직녀, 별자리 이야기를 들으며 은하수가 흐르는 강물을 건너 홑이불 속에서 잠들곤 했다.

가을철 운동회때가 되면 6개 마을 합동 축제일이 되었다. 학부모님들은 고구마, 삶은계란, 밀가루떡 등 모처럼 푸짐한 음식을 장만해 오셔서 큰잔치를 벌였다. 우리들은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기마전, 줄다리기, 씨름대회, 달리기 등을 할때면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이 모여 열정적으로 응원했던 울림소리는 학교 울타리를 넘어 온마을까지 메아리쳤다. 

필자는 덩치만 컸지 뜀박질를 못하여 겨우 3등이라도 하고 공책 한 권을 받아오면 아버지, 어머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시며 참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파란 가을하늘 아래 운동장 주변을 감싸고 있는 코스모스꽃들이 산들바람에 한들한들 춤추며 그윽한 향기를 내뿜어 운동회 축제를 한층 더 즐겁게 해주었다.

어느덧 6년간 다니던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의 노래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려갑니다" 2절을 부르고 "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3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18세 큰누나의 목청에서 터져나온 울음소리로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우리 모두가 정든 교문을 뒤로하고 동네 모퉁이를 돌아설때에 다시한번 부등켜 안고 아쉬움을 달래며 흐느껴 울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서로 돕고 의지하며 순수하게 정을 나무며 꿈을 키웠던 새싹들이었다.

이제는 고향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버리고 70세 이상 노인들이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다.

한때 700여 명에 이르는 큰학교로 발전했던 군서남국민학교가 취학아동이 절대 부족하여 폐교되고 원래의 구림국민학교로 통합되어 지금은 필자의 모교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20여년이 되어간다. 격변해가고 있는 시대가 몹시 야속하기도 하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60여 년을 훌쩍 넘겨 70대 중반기를 살아가면서 더욱 간절히 국민학교 그때 그 모습을 그리워하며 옛 친구들을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더욱 건강하게 오래 살아 서로 오가며 깊은 우정을 나누면서 아름다운 여생을 함께 살아가고 싶다. 

내 고향 마을 대자연의 숨소리를 듣고 생활하며 체험하면서 우리 어린 새싹들이 농촌의 꿈과 낭만을 키워갈 수 있도록 전남도 교육청이 추진하고 있는 도시학생 농촌마을 유학제도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