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06) 동해 해양신앙의 상징, 동해신사(하)

동해신사 중수기념비 / 일제가 동해신묘를 훼철하여 중수비를 두 동강 내버렸으나 그 후 복원하여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73호로 지정하여 동해묘 건물 옆에 세워 놓았다. 중수(重修) 기록이 없는 남해신사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동해신사 중수기념비 / 일제가 동해신묘를 훼철하여 중수비를 두 동강 내버렸으나 그 후 복원하여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73호로 지정하여 동해묘 건물 옆에 세워 놓았다. 중수(重修) 기록이 없는 남해신사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동해신사 중수기의 의미

동해신사는 남해신사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동해묘’ ‘동해신묘’ 등의 명칭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면서 그 격이 약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중수(重修) 기록이 보이지 않은 남해신사와 달리 동해신사는 중수 기록이 보인다. 

조선 경종 2년(1722년)과 영조 28년(1752년)에 양양 부사 채팽윤과 이성억이 각각 중수하였으며, 정조 24년(1800년)에는 어사 권준의 상주(上奏)와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의 주장으로 재차 중수되었으나, 순종 2년(1908년)에 일본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철폐되었다. 

다음은 암행어사 권준이 동해신사의 제례와 관련하여 국왕에게 올린 상소이다. 당시 상황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설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살펴보려는 것은 남해신사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양양 낙산진에 있는 동해신묘는 제향을 드리는 예법이 나라의 법전에 실려 있으니 이곳을 어느 정도로 중시했던가를 알만 한데, 근년 이후 제관이 된 자가 전혀 정성을 드리지 않아 제물이 불결하고 오가는 행상들이 걸핏하면 복을 빌어 영락없는 음사로 변했으며, 게다가 전 홍천현감 최장적의 집이 신묘에서 매우 가까운 지점에 놓여 있어 닭이며 개들의 오물이 그 주변에 널려 있고 마을의 밥 짓는 연기가 바로 곁에서 피어오릅니다. 신과 인간이 가까이 처해 있는 것은 신을 존경하되 멀리한다는 뜻에 자못 어긋납니다. 요즘 풍파(風波)가 험악해져 사람들이 간혹 많이 빠져 죽고 잡히는 고기도 매우 양이 적은데, 해변 사람들이 다 그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억지로 끌어다 붙인 말로서 족히 믿을 바 못 되지만, 신명을 존경하고 제사 예법을 중시하는 도리로 볼 때 그냥 놔둘 수만은 없습니다. 감사에 분부하시어 그 사당을 중수하여 정결하게 만들고 제향에 올리는 제물도 다 정성을 드리게 하며, 미신으로 믿어 기도하는 일을 일체 금지시키고 사당 앞의 인가도 빨리 철거하도록 명하소서” 

이에 따르면 최근 들어 전혀 관 주도의 제례가 행해지지 않다 보니 동해신사가 행상들의 음사로 전락하였고, 이 때문에 풍파가 빈번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동해신사가 동해의 해양신앙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국왕의 전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장계를 살펴보니, (강원도)간성 백성들 또한 살 곳으로 나아가 안정되게 살아갈 가망이 있어 매우 다행스럽다. 덧붙여 아뢴 여러 조항 가운데 첫 조항은 사실 옳은 말이다. 즉시 문건을 만들어 감사에게 보내거니 아니면 고을 수령에게 분부하여 간성 고백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신역을 경감해 주도록 하라. 간성 해변 마을에서 1백 명에 가까운 사람이 바다에 빠져버렸는데도 아직까지 조정에 알리지 않으면서 어찌 생사를 분간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즉시 감사로 하여금 지방관을 엄중히 지시하여 제단을 설치, 위 문제를 행하도록 하고 선세도 장청(狀請)대로 거행하라. 양양 낙산진 동해신묘에 관한 일도 장청대로 보수한 뒤에 감사가 그 결과를 장계로 보고하면 권준을 헌관으로 차임하여 제물을 올려 양양 백성들이 옛날처럼 풍요를 누리도록 빌겠다.”

국왕은 동해신묘를 보수하고 예전처럼 지방관이 치제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해서 동해신사는 다시 동해의 해양신앙으로서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남해신사도 조선 후기 18세기 무렵의 상황을 허목의 글에서 엿볼 수 있거니와 조선 전기보다는 약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해양신앙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이 무렵의 동해신사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관동록의 동해묘에서’라는 시가 있다. 이 시를 그대로 인용해 본다.

“동해묘 옆 소나무 숲/ 짙푸르게 해 가려 낮에도 늘 그늘이네/
봄에 비바람은 신령한 변화있고/ 사철 피리 소리 서로 화음/ 
무당의 말 술자리에 황당하게 전하고/
용왕 거처에 장막 닫힌 채 침침하구나/
올 농사 하나도 덕 보지 못했으니/
가을 제사에 보새하는 마음 아프겠네/”
(동주집 제7권 시)

동해신사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무당들이 이용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었음을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준의 장계와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용왕 거처에 장막 닫힌 채 침침하구나’라는 구절인데, 동해신사의 주된 기능이 동해의 해신인 ‘용왕에 제를 지내는’ 것임을 말해준다. 남해신사도 남해의 용왕에 제를 올리는 기능이 주된 기능임을 확인할 수 있겠다. 왕건이 나주 원정에 나섰을 때 남해바다의 용왕에 제를 올렸다는 설화 역시 이와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용을 해신으로 숭배하다 

한편 권준의 장계에 따라 1800년 정조 때에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이 동해묘를 중수하였다. 현재 양양의 동해묘 건물 옆에 ‘동해신묘중수기사급명’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 원문과 번역문이 소개되어 있다. 참고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바다신과 왕을 함께 모시어 정성껏 제사 지내는 것은 그 덕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다. 주역의 설궤에 말하기를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물보다 더한 것이 없고, 물이라 함은 넓음을 이름이다. 따라서 그 집을 세움에 있어 두 사람이 하나로 교류하여 그 가운데에 생기는 것이 물이니 하나로 나타남으로서 비롯되었고, 두 사람을 남녀에게 비유하면 음과 양이 합하여 하나로 일어남이다. 주나라 황제는 네 차례를 지내는 데 경칩에 교외에 제사를 지내고 입하에 기운을 맞이하여 제사 지내고, 백로에 비 오기를 제사하고, 대한에 납향으로 제사하니 한 해에 네 번 제사 지낸다. 왕의 양규는 오촌을 둔다. 희생으로는 작은 소나 양을 사용하며, 폐백은 오방색으로 하고 왕과 시동은 모두 취면을 쓰고 음악은 유빈을 연주하고 노래는 함종을 부르고 춤은 대하로 추기를 다섯 번 한다. 헌기는 가지런히 하는 것은 조천을 드리는 것이고, 청주는 궤식을 드리는 것이다. 후세에 또 동해에 왕의 작호를 더하여 광덕왕이라고 하였고, 서해를 광윤왕, 남해를 광리왕, 북해를 광택황이라고 하여 제후의 예로 지역 안의 악독(嶽瀆)에 제사를 받았다. 우리나라도 동해신묘가 양양부의 다스리는 동쪽 10리에 있는데 성상 정종 24년 어사 권준이 언신으로 군현을 갔다가 동해신묘가의 담장이 허물어져 마땅히 다시 수리를 해야 하는 데 민가 여덟 집이 묘 근처에 살아 모두 철거하여 닭이나 개 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게 하여 악독의 제사에 엄숙하게 하니 사방의 홍수와 가뭄, 질병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렇지만 매우 숭상하고 높이는 도를 이룬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법식을 지어 금지하게 하는 날 관찰사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신 공철이 마침 관동에 순찰사로 삼가 예부가 되어 거행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급히 향축이 서울에서 와 준이 차헌관으로 제사를 지냈다. 아! 질병으로 아픈 사람은 반드시 호소하는 것은 사람의 정으로 백성들 가운데 해신을 부모처럼 여기고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비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제사에는 항상하는 제사가 있으니 저 어리석은 남녀들이 금백(金帛)을 가지고 온 자들이 장차 신에게 아첨을 구하는 것은 복을 맞이하려는 예가 점점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넘쳐나 한층 더 고집함이 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금지시키는 것은 바로 신을 지극히 높이고 바른대로 백성들을 인도하려는 것이니 일거양득이다. 마침내 이 일을 기록하고 돌 비석에 새겨 그 느낀 것을 푸니 묘우(廟宇)가 때에 따라 보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유사를 두었다.”

일제가 동해신묘를 훼철하면서 이 중수비를 두 동강을 내버렸다. 이를 복원하여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73호로 지정하여 동해묘 건물 옆에 세워 놓았다. 

결론적으로 양양은 바다와 접하면서 삶의 터전을 영유하였다. 이들은 용을 해신으로 숭배하며 삶을 영유하였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동해신사는 말하고 있다. 동해신사도 역사적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명칭의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조선 후기에 올수록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면서 동해신사가 지녔던 신성성이 약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해신사의 사정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이나, 남해신사는 동해신사와는 달리 여전히 소사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 이전의 중사보다 비중이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국제(國祭)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를 대변한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인조차도 ‘해독’ 신앙의 중심으로 남해신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해신사와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아울러 동해신사 중수기와 같은 기록이 우리 근처 어디에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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