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05) 동해 해양신앙의 상징, 동해신사(東海神祠)(上)

남해신사와 더불어 강원도 양양의 동해신사, 황해도 풍천의 서해단을 3대 해신당으로 부르고 있다. 고려 초에 국가에서 제를 주관한 유일한 해신당은 남해신사였으나 고려 후기에 동해신사와 서해단 등 국가의 지원을 받는 해신당이 동·서 해안에 추가되었다. 

남해신사는 1990년대 말 목포대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여 그 터가 확인되어 2000년대 들어서 복원이 되었으나 동해신사는 남해신사보다 약간 이른 1993년 복원되었다. 현재 복원된 동해신사는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 399번지에 석축을 쌓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정전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그 신당의 유구는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묘당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2021년 9월 현지 답사하였을 때 현재의 동해신사 정전 건물 앞 소나무 숲이 원래 동해묘의 정전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는 양양군 관계자의 설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사유지로 되어 있어 발굴 조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동해신사와 서해단 역시 고려 후기 이래 국제(國祭)로 인정된 대표적인 해양신앙이기 때문에 이들을 함께 살피는 것은 남해신사의 성격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서해단은 황해도 풍천에 있어 현실적으로 조사도 불가능하고 연구도 거의 확인할 수 없다. 동해신사에 대한 고찰이 더욱 중요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본란을 통해서 동해신사를 간단히 살핀 바 있다. 오늘은 두 차례에 걸쳐 좀 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1908년 일제에 의해 훼철 

남해신사에 관한 연구처럼 동해신사 연구도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전문 연구자의 논고가 있어 전체적인 윤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여기에 양양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가 최근 동해묘에 관한 연구를 서두르고 있다. 연구소에서는 동해묘에 대한 그동안의 몇 안 되는 연구조차 부정확하여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한 자료집을 제작하고 있었다. 곧 양양인들은 동해신사가 양양의 정체성을 살피는 데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국권을 강탈하면서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을 붕괴시키려 하였다. 바로 민중에 뿌리내려져 있는 전통신앙을 미신이라 하여 파괴하였다. 그 영향을 받아 지금도 전통신앙을 미신이라고 하여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식민사관 극복과 관련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역사는 당대의 시각으로 살펴야 그 진실이 드러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동해신사는 남해신사와 마찬가지로 통감부 훈령으로 1908년 12월 26일 훼철되었다. 그런데 당시 최종락 양양군수가 훼철 작업을 망설이는 관리를 윽박질러 훼철 작업을 강행하였다 한다. 최종락은 동해신사를 훼철하였을 뿐 아니라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이 지은 양양동해신묘중수기비(襄陽東海神廟重修紀事碑)까지 두 동강을 내어 묻어버렸다 한다. 이로 인해 화(禍)를 입어서인지 군수 최종락은 동해묘 훼철 후 3일 만에 동헌에서 피를 토하고 급사하였고, 그의 아들도 뒤에 곧 급사하였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고 한다. 일제가 훼철한 후, 신사 터를 매입하여 그곳에 조상의 묘를 쓴 후 멸문(滅門)되었다는 남해신사와 모티브와 비슷하다. 

산천에 제를 지내는 의식

남해신사와 마찬가지로 동해신사는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일종의 해양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해의 해신을 신성시하는 의식은 일찍부터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동해의 수호신인 토함산을 동악(東岳)으로 삼아 제를 지내고 있는 사실이 삼국유사 탈해왕 조에 보인다. 

이처럼 산천에 제를 지내는 의식은 이미 삼국시대에 국가의 제사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삼국사기 제사지에 “중사(中祀) 오악(五岳) 동쪽에 토함산(대성군) 남쪽에 지리산(청주) 서쪽에 계룡산(웅천주) 북쪽은 태백산(날이군) 중앙에는 父岳(一云 공산 압독군)”이라 하였다.

여기서도 동해 바다의 해신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 고려 시대에 동해의 해신을 모시는 양양에 사당을 국제로 승격시켰다고 본다. 

“(전략) 원종 원년 지양주사(知襄州事)를 승격시켰다. 별호를 양산(襄山)이라 하였다. 동해신사(東海神祠)가 있었다.”(고려사58, 지12, 지리3, 익령현)

원종 원년에 양양에 동해의 해신을 모시는 신사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 시대의 ‘嶽海瀆壇(악해독단)’에 동해는 양양, 남해는 나주, 서해는 풍천이라 하여 고려 시대에 이어 동해의 용왕을 모시는 사당이 양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미신적인 면이 있다고 비판을 받았던 양양의 해신에 제를 지냈던 의식을 원종 때에 이르러 국가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동해신사는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국가에서 주관하는 해신당으로서의 기능이 이어졌다.   

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며 계속 국가신앙으로 받아들였던 해양신앙을 비롯한 전통신앙이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샤머니즘과 결합이 되면서 당제(堂祭) 등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게 되었다. 따라서 원래 해양신앙이 지닌 구성 체계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전통 사상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작업이 쉽지 않으나 아직 남아 있는 전통에 깃들어 있는 구성 모티브를 옛 문헌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비교사학을 하면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다.

조선시대 ‘동해신단’ ‘동해묘’

‘남해신사’도 최근에 ‘남해당’ 등 여러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를 ‘남해신사’로 칭함이 옳다고 이야기 한 바 있지만, 동해신사도 명칭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전문연구자들 사이에도 정영호는 ‘동해묘’, 양언석은 ‘동해신사’ 등 각기 달랐다. 양양 향토문화연구소에서는 ‘동해신묘’로 부르는 등 혼란스럽다. 현재 양양 현지에 복원된 해신당의 현판은 ‘동해묘’로 되어 있다. 이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위에서 살폈듯이 고려 원종 원년에 ‘동해신사’로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고려사 지리지 익령현조에 의하면 “유명한 산 설악은 부의 서쪽에 있다. 신라 때 소사가 되었고, 동해신사당이 부의 동쪽에 있다.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중사에서 제를 지냈다.”고 하여 동해신사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고려 시대를 기록한 고려사의 기록에 ‘동해신사’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해신사’라는 용어 대신 ‘동해신단’, ‘동해묘’라는 명칭이 조선시대에 오면 나오기 시작한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동해신단, 동쪽 13리에 있다. 고려 때 동해이므로 중사에 실려 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라고 하여 ‘동해신단’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관동지’에 “동해묘, 부 동쪽 10리 바닷가에 있다. 정전 6간, 신문 3간, 전사청 2간, 동서제 각 2간, 백천문 1간으로 매년 초에 별제를 지내고 2워르 8월 상제(常祭)를 지낸다. 향과 축은 모두 서울에서 내려온다.”라 하여 동해묘라는 명칭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등 조선 시대의 사서에는 “동해를 지키고 다스리는 동해묘를 강원도 양양 땅에, 서해를 지키고 다스리는 서해단을 황해도 풍천에, 남해를 다스리고 지키는 남해신사를 전라남도 나주에 각각 모셨다.”라고 하여 동해묘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동지지에는 “강원도 양양군 단유(壇壝)편에 양양군 동쪽 13리에 있는 동해신묘에서 고려 때부터 중사로 받들어왔으며 그 전고(典故)에 의하여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다”라고 하여 동해신묘라고 하였다. 

이렇게 살필 때 동해의 해신에 제를 지내는 양양의 해신당을 고려 시대에 ‘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 초에 나온 남해신사라고 하여 남해만에 있는 해신당에 붙여 사용한 명칭을 동해신사 경우에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 하겠다. 남해신사가 조선 후기에 그 비중이 약화되면서 남해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듯이, 동해신사 명칭 또한 조선 시대에 들어와 그 격이 낮추어지면서 동해묘나 동해신묘가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동해묘’의 명칭도 원래의 명칭인 ‘동해신사’로 고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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