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재 홍   서호면 몽해리 아천출신연합뉴스 뉴스통신진흥회 이사                                                           전 경기대 교수(정치학 박사) 전 KBS제주방송 총국장
윤 재 홍  서호면 몽해리 아천출신연합뉴스 뉴스통신진흥회 이사  전 경기대 교수(정치학 박사) 전 KBS제주방송 총국장

“세월은 화살보다 빠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어렸을 땐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필자가 80세를 눈앞에 둔 70대 중반이 넘어 세월의 빠름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산골짜기 시골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웅변대회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책상을 쳐가며 소리 높여 외치며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신바람이 나 각종 웅변대회에 출전해 상을 받는 재미로 자주 웅변에 열중했다. 추석 명절 때마다 고향 마을에서 노래자랑 콩쿨대회가 열려 소년인데도 유행가를 불러 어른들과 경쟁에서도 푸짐한 상도 받았다. 필자는 또한 글쓰기를 좋아해 글짓기와 일기를 매일 썼다. 특히 일기는 중학생부터 군 복무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빠짐없이 매일 썼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29세의 아버지를 잃었다. 그 후 28세의 홀어머니는 행상으로 농촌일 품팔이 등을 하셔 누나와 남동생 등 3남매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연명하며 겨우 생존할 수 있었다. 너무 가난하여 필자는 고향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등록금을 내지 못해 자퇴했다. 어머니를 도와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중학교 과정을 독학했다. 6.25전쟁을 원망하면서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농사일을 하는 필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 많이 울기도 했다. 그 후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고등공민학교에서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합격했으나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도 없었다. 필자가 농사일을 하고 있을 때 방학이 되면 광주나 목포에 진학한 친구들이 중학교 교복을 입고 고향에 나타났을 때 가장 슬펐다. 

결국 서울에 무작정 상경하여 고학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사 정치부 차장이었던 외삼촌께서 작은 신문사의 사환으로 취업을 시켜줬다. 돈이 없어 사무실에서 전기곤로에 밥을 해먹었다. 책상위에 군용담요를 깔고 덮고 자고 사무실과 화장실 청소와 연탄을 갈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고통스러운 생활이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어 대학생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신바람이 났다. 성균관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했으나 입학금 때문에 매우 걱정됐다. 이때 외삼촌께서 입학금과 교복 한 벌을 선물로 주시면서 “이제부터 네가 혼자 힘으로 고생하며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한다.”며 격려해주셨다. 가난 때문에 2년 늦깎이 대학생이 됐지만 새롭게 힘이 솟았다. 그러나 2학기 등록금이 없어 결국 군에 입대했다. 군부대에서도 위생병으로 근무하면서 남는 모든 시간을 공부에 투자했다. 전역 후 복학하여 중·고등학교 그룹과외를 전차를 타고 모두 4곳에서 했다. 학생들의 성적이 올라 좋은 대접을 받았다. 결국 대학공부와 그룹과외 공부가 겹쳐 평소에 꿈이었던 사법고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필자의 적성에 맞는 말과 글로써 평생을 일하는 방송기자의 길로 목표를 바꿨다. 대학생 가장인 필자가 3남매를 위해 고생하신 홀로되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방송기자로 성공하는 길밖에 없다고 굳게 다짐했다. 

필자는 방송기자로 성공하기 위해 인생목표 4가지를 설정해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첫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정받자. 부모, 형제자매, 직장동료와 선후배, 친구 등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인맥을 철저하게 관리한다. 
둘째는 어떤 경우라도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고 보람 있고 알차게 보낸다. 셋째는 언제 어디서나 주어진 환경에 항상 1인자가 되도록 한다. 넷째는 미래를 철저히 준비하면서 현재를 산다. 앞으로 10년, 20년, 30년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목표를 정해 차질 없이 달성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산다.

필자는 위 인생목표 4가지를 달성하기 위해 현직에서 열심히 뛰었다. 야간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고, 정치학 박사학위(방송전공)는 3수를 해서 45세에 시작해 50세에 받았다. 당시 KBS TV 뉴스에 전국부장이던 필자의 박사학위 수여식이 보도되기도 했다. 박사학위가 있어도 대학교수가 되려면 하늘의 별따기다. 58세 정년 후 대학교수가 되면 약 8년 65세까지 강의한다. 교수가 되려면 다시 논문과 방송전공 책을 써야 한다. 따라서 KBS 재직 중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방송실무 책을 썼다. <TV뉴스 취재에서 보도까지>, <방송기자로 성공하는 길-입사시험에서 데스크까지>, <방송뉴스 기사작성 요령-공저> 총 3권, 그리고 자서전 <아프리카 추장이 되었다>까지 모두 4권의 책을 썼다. 필자는 58세에 KBS제주방송총국장으로 정년을 앞두고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언론미디어학과 교수초빙 신문광고를 보고 응시했다. 모두 30여명의 국내외 40대 젊은 박사들이 지원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나 KBS 방송뉴스 실무경력을 가진 필자가 최종합격했다. 2011년 경기대학교 교수 정년을 앞두고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초빙교수로 70세까지 강의를 했다. 이어서 국회와 정당 추천으로 연합뉴스 뉴스통신진흥회 이사로 3년을 더 근무했다.

이밖에 필자가 30여년 동안 서예를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교수 정년 후에는 서예학원을 설립해 어린이와 주부들을 대상으로 서예 선생으로서 서예와 한자 등을 가르치며 노후 활동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흙수저인 고학생이 역경을 헤치고 방송기자가 되기까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노력해 방송기자와 대학교수, 서예가까지 인생 3모작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지금도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 전집을 발간해 3천만권의 밀리언셀러를 한 만화문화 콘텐츠 그룹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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