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행  /영암지역자활센터 센터장/동아보건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영암군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전라남도교육청 교육참여위원장
이삼행  /영암지역자활센터 센터장/동아보건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영암군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전라남도교육청 교육참여위원장

3.1절을 앞둔 대통령 후보 TV토론에서 한 야당 후보가 “한·미·일 군사동맹 체결, 유사시 일본 자위대 한반도 진입 가능할 수도 있다”라는 참담한 발언을 했다. 기본적인 역사의식이 있는 것인가?

‘대한민국의 악인 열전’이란 책이 있다. 저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근현대사의 악인들, 악랄한 자들을 절대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역사적 악인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인, 경찰 출신이거나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자들인데 해방 후 좌우 대립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당당하게 반공 애국자로 둔갑하여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거나 민중들을 학살하고도 애국 유공자로 평가받는다.

자칭 백두산호랑이 살인마 김종원

일본군 하사관으로 중·일 전쟁에 참가하고, 해방된 조국에서 동대문경찰서 교통과장,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전남경찰청장을 걸쳐 치안국장까지 한 인물이다. 김종원은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지휘자로 시민들을 초등학교에 모아 일본도로 목을 자르는 등 화풀이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빨치산을 잡는다며 민간인 학살을 계속하여 ‘살인마’라고 불렸다. 한국전쟁 중 영덕에서 수백 명을 학살했고, 마산과 부산 형무소에 갇혀있던 정치범 3천500명을 학살하는 데도 개입했다. 거창양민학살 때도 아이들과 여자들이 대부분인 500명의 피난민을 집단학살했다. 그런데 현재 경북도청 홈페이지에는 ‘경북을 빛낸 인물-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총애를 가득 받고 혜성같이 드러났다가 사라진 이형적 인물’로 버젓이 등재되어 애국자로 평가되고 있다.

음모와 공작의 달인 김창룡

일제 강점기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다. 항일조직을 무너뜨리고 독립군을 체포하고 고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해방 전 2년 동안에만 항일조직 50여 개가 적발되었다. 해방 후 고향 함경도 영흥에서 소련군에게 친일부역자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도망쳐 월남했다. 남한에서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하에 새롭게 태어난다. 방첩대장, 특무부대장 등을 맡아 좌익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온갖 정치공작과 사건 조작, 민간인 학살을 일삼았다. 특히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1992년 “단정 수립에 반대하는 백범을 제거해야 한다고 김창룡 특무대장이 세뇌시켰다”라며 김창룡이 김구 암살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인정했다. 친일군인이었다가 빨갱이 때려잡는 귀신으로 둔갑, 반공애국자 평가를 받고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 69호에 묻혀 있다.

일제 악질 경찰의 대명사 노덕술

1933년 인천경찰서 경부(경감), 1943년 평안남도 경찰부 경시(총경급)가 되어 조선인으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경찰이었다.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고문 방법을 고안해서 지독하게 항일독립인사들을 고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해방 직후 평양경찰서장을 하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월남하여 1946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등 치안관리의 중책을 맡았다. 그는 독립투사를 잡는 ‘친일 악질경찰’이라는 이력 대신 빨갱이 잡는 ‘반공경찰’로 변신하여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1950년에는 헌병대장 이후 부산 육군범죄수사대장이 되었다. 1949년 1월에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전 국민이 친일경찰 노덕술 처단을 요구할 때 이승만은 “노덕술은 나라를 위해 요긴하게 쓰일 기술자이니 석방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일제청산의 역사적 깃발은 시작도 못하고 막을 내렸다. 이후 친일경찰 노덕술은 한국전쟁의 전투공로를 인정받아 충무무공훈장(3등급), 화랑무공훈장(4등급)을 받았다. 영화 ‘암살’ ‘밀정’에서 나온 의열단장, 광복군 부사령관 김원봉 선생의 일화는 가슴 아프다. 해방 후 김원봉 선생은 애국경찰로 둔갑한 노덕술에게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노덕술은 김원봉 선생의 뺨을 때리고 모욕했다.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이런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 있소?” 무장독립투쟁의 상징 김원봉 선생은 며칠을 통곡했다고 한다.

친일청산 계속 돼야

해방 후 우리는 친일반역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 77년째 청산하지 못한 친일세력의 뿌리가 군사독재와 보수세력으로 포장되어 지금까지 정치, 경제, 언론, 문화, 사법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승만-박정희-이명박-박근혜 정부로 대물림 된 것이다. 

독일의 나치 부역자 처벌은 단호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 경비병에게도 5년형을 내렸다. 해방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친일 부역자에 대한 역사적 심판은 엄격해야 한다. 그래야 부끄러운 과거와 단절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친일행위자에 대한 잘못된 기록과 잔재들을 바로잡고 심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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