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03) 전방후원형 고분 재론(하)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전방후원형고분으로 마한 남부연맹체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전방후원형고분으로 마한 남부연맹체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현대사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필자는 지난 2월 23일 혁신 운동에 바탕을 둔 독립운동을 전개한 강석봉 선생 평전 출판회를 광주에서 열었다. 강석봉 선생과 교류한 인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인물이 영암 출신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가운데 조극환 선생과 항일운동에서 평생 동지로 지냈다. 강석봉이 미군의 공습을 피해 영암 구림에 있는 조극환의 별장에서 상당 기간 머무른 것도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조극환 선생의 사진을 찾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마한사도 중요하지만, 현대사에 대한 관심도 이에 못지않게 가져야 함을 알려주는 사례다.  

왕조 권위의 상징, 일본 전방후원분

지난 주에 이어 전방후원형 고분을 다시 정리하고자 한다.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일대에 분포한 거대한 옹관고분은 내비리국 등 영산강 유역의 재지 세력들이 그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영한 것이었다. 실제 ‘大王墓’라 불리는 거대 전방후원분이 밀집되어 있는 일본의 百舌鳥·古市 고분군이 중국 대륙과 조선반도로부터 들어오는 입구인 오사카만과 정치 중심지인 나라 분지 사이에 있다. 이곳에 조영된 거대 고분은 외국 사신들에게 그들 왕조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연맹체들은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신촌리 9호분 같은 고총(高塚)의 옹관고분을 조영하였고, 일본의 거대 고총인 ‘전방후원분’에도 주목을 하였던 것은 아닌가 한다. 전방후원형 고분이 倭와 유사한 측면도 보이지만 재지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어, 재지 세력들이 마냥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광주 월계동 등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잇달아 발견되자 이 지역이 ‘임나일본부’ 관할 아래 있었다는 과거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큰 관심을 가졌다. 반면, 한국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와 관련되는 것을 우려하여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오히려 한반도에서 넘어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방후원분 문제는 한·일 양국 사이의 현재적 상황과 관련하여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는 셈이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왜·마한 교류의 상징 

그러나 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3세기 후반에 나타나 6세기까지 유행하였던 고분이고,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도 그것과 유사한 측면도 적지 않다. 말하자면,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의 출현은 어디까지나 두 지역의 문물 교류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을 조선반도 정복설의 근거로 삼거나, 반대로 일본의 억측에 대한 피해 의식에서 역사적 실상과 동떨어진 해석을 하는 것 모두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전방후원분은 고분의 형태가 앞부분은 방형이고 뒷부분은 원형으로 조영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일본에서는 3세기 고분 시대에 출현한 이래 4세기 후반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대형고분으로 발전하였다. 우리 지역에서 출토된 규모가 큰 해남 용두리 고분과 함평 장고산 고분은 길이가 각각 77m, 70m에 달해 마치 작은 동산을 연상할 정도이며, 현재 확인된 것만 14기로 영산강 유역 주변에 분포되어 있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원부에 비해 방부가 발달한 길이 400m 이상의 거대 고분이 100여 기 이상이 조영되어 있는 오사카 남부의 古市古墳群과 百舌鳥古墳群에 있는 고분과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출토된 토기 등 유물들이 영산강 유역 계통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문화전파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의 전방후원형 고분에 우리의 고총고분이 영향을 오히려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된 전방후원형 고분의 축조시기만 놓고 보면 일본의 것이 시기가 약간 앞서고 있다. 이로 보아 일본과의 교류 과정에서 전방후원형분의 존재를 알게 된 영산강 유역의 재지 세력들 가운데 일부가 이 묘제를 채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형 옹관 고분을 조영한 경험을 가진 영산강 유역의 재지 세력들에게 전방후원형 고분 축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방후원형 고분 피장자는 토착세력 

광주 월계동의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되는 분주토기(하니와)들이 영산강 유역의 대형 옹관 고분인 신촌리 9호분에서도 출토되고 있고, 나주 복암리 대형 옹관 고분군에도 역시 월계동 전방후원분과 같은 형태의 석실이 조영되는 것으로 보아 전방후원형 고분의 조영이 재지 토착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고분은 처음에는 1, 2기씩 분포하고 있었지만 점차 인근 지역에 대형 고분들이 조영되고 있어서 조영 세력이 정주화, 재지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점, 전방후원형 고분의 분포 지역이 상당히 넓게 형성되어 있는 점에서 재지 세력들이 조영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더구나 대부분 전방후원형 고분이 영산강 유역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은 점도 영산강 유역의 연맹체 수장들과 깊은 관련이 깊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왜와의 교류를 통해 알게 된 대형 고분인 전방후원분을 조영하면서 그들 힘을 과시하려 했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껏 전방후원형 고분을 토착세력이 조영했다고 하는 것을 수긍하지 못한 연구자들의 주된 근거의 하나가 이러한 고분을 조영할 정치세력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5세기까지 ‘침미다례’ ‘내비리국’ 중심의 강력한 마한 남부연맹체가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존의 이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원분의 형태로는 거대 고분을 조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산강 유역의 정치 세력들이 거대 고분 형태를 채택하면서 나타났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외형적으로 왜와 비슷하다고 하나 독자적인 내부 석실 양식을 채택하고, 분주 토기 또한 재지적인 성격이 드러난 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이 지역의 문화 역량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긴끼의 수에키 토기를 대부분 부장품으로 사용하지만, 영산강 유역의 부장 토기들은 영산강 유역 산으로 일본 열도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전방후원분이 백제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영산강 유역 정치세력들이 왜와 연합하는 과정에서 채택된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학자들에게 이용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마한 남부연맹의 힘을 보여줘

여하튼, 거대한 전방후원분을 조영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과시한 재지 세력들이 영산강 여러 곳에 있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이들이 비슷한 형태의 전방후원형 고분을 조영한 것은 같은 마한 남부연맹체였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고분의 크기만 가지고 정치 세력의 규모를 언급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이와 같은 거대 고분을 조영했다는 것은 영산강 유역 정치체들의 강력한 힘의 반영임은 분명하다. 다만, 그 전방후원형 고분들의 규모가 비슷한 것은 이들 지역의 정치체들의 세력 차이가 크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본다. 이처럼 비슷한 세력이 분산되어 있는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를 결성하는 데 한계로 작용했을 법하다. 

요컨대,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고분은 이들 지역이 마한 남부연맹체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임과 동시에 독자적 세력을 구축한 왕국이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산되어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가 확인되고 있는 전방후원형고분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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