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서 출신 박연재 변호사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에 각별한 관심

환갑의 나이에 변호사가 되다

“일흔의 나이에 자식뻘 되는 변호사들과 경쟁하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법조인으로서 자긍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언론인에서 법조인으로 옷을 갈아입은 군서 출신 박연재 변호사(70). 사법시험 사상 최고령 합격자로 화제를 모았던 그가 올해로 변호사 개업 10년째를 맞았다. 그의 법률사무소는 광주법조타운 한쪽 빌딩 4층에 자리하고 있다. 단촐한 사무실에 서류 더미와 씨름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환갑의 나이에 변호사가 된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드라마틱하다. 광주일고를 졸업한 그는 1970년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전남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2학년 때인 1971년 10월 15일 전국 대학에 위수령이 내려졌고 그는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때 ‘주홍글씨’는 10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대학을 마치고 월세방을 전전하며 공부한 끝에 1981년 사법시험 1·2차 필기시험에 합격했지만 3차 최종면접에서 탈락했다. 과거 시위 전력 때문이었다. 법조인의 꿈이 좌절된 그는 한국방송공사(KBS) 기자 공채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기자를 운명으로 알고 30년을 살았다.

무너진 그의 꿈이 다시 피어난 것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위)의 권고였다. 위원회는 2007년 시위 전력으로 사법시험 면접에서 탈락한 응시자 10명에게 연수원 입소 기회를 주도록 법무부에 권고했다. 이듬해 1월 박 변호사는 3차 면접을 다시 본 뒤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사법시험 사상 최고령 합격(56세)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지 38년, 사법시험을 본 지 27년 만이었다.

6·25전쟁 민간인 희생 각별한 관심

박 변호사는 법조인 가족이다. 현직 검사인 딸(연수원 38기)과 변호사인 사위(연수원 39기)는 그의 법조계 선배다. 연수원 43기인 며느리도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지역 법조계에서 6·25전쟁 민간인 희생사건의 전문 변호사로 명성이 높다. 그는 2012년 고향 사람들을 통해 영암에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 사건을 접했다. 그는 영암 민간인 희생 사건의 피해자 유족 3명과 2012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과거사위, 유족 진술 등을 근거로 2014년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끌어냈다. 이를 계기로 전남 화순, 나주 등에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 사건 의뢰가 잇따랐다.

2016년 12월 ‘화순·나주 민간인 희생 사건’의 피해자 유족 1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또다시 승소했다. 과거사위의 진실 규명 ‘확인’이나 ‘추정’ 결정 사건의 경우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은 있었으나 불법성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불능’ 결정에도 대법원이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앞으로 얼마나 더 변호사 생활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찾는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안고 살아온 만큼 다시는 역사적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인권 보호에 힘쓰겠다는 늦깎이 변호사의 다짐이다. 

군서면 평리에서 태어난 그는 전남대학교 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KBS 광주총국 보도국 취재부장과 편집부장, 본사 홍보실 차장·보도국 전국부 차장, 광주총국 보도국장, 목포방송국장, KBS 광주총국 심의위원을 끝으로 방송계를 떠나 변호사로 2모작 인생을 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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