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곤 / 금정면 출생 / 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전문연구위원 / 전 한국섬유기술사회 회장 / 전 충남대, 청운대학교 교수
김해곤 / 금정면 출생 / 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전문연구위원 / 전 한국섬유기술사회 회장 / 전 충남대, 청운대학교 교수

오늘 아침도 쌀알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꽁보리밥이었다. 아직 어린 동생들은 계속 할머니의 밥그릇을 힐끗거렸다. 우리는 비록 꽁보리밥이지만 할머니의 진지만은 늘 하얀 쌀밥이다. 어머니께서 솥 한쪽에 할머니의 진지만 따로 쌀로 지으시기 때문이다. 점심 무렵에 스님 한 분이 대문 앞에서 시주를 구하는 염불을 하셨다.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생각하며 스님께 그냥 가시라고 대문으로 향하는데, 어머니께서 주발에 반 넘어 쌀을 담아내게 건네셨다.

“스님께 드리고 와라” “아니 어머니, 우리 먹을 쌀도 없는데…” “어허, 토 달지 말고 갖다 드리고 오래도…”

짐짓 엄하신 어머니의 말씀에 쭈뼛거리며 대문간에 계신 스님께 쌀을 시주하고 돌아서는데, 손금이나 한번 보자며 스님께서 나를 멈춰 세우셨다. “곳간을 다 털리지만 만 년에는 가득 차겠구나” 하신다. 속으로 “뭐래?: 하면서도 잘된다는 말에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을 먹는 처지에 쌀을 반 주발도 넘게 시주를 하시는 어머니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어머니는 절에 다니시는 것도 아니었다.

벌써 70년도 훌쩍 넘은 일이지만 기억에 생생한 어머니의 일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던 시기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가 아니셨다. 당신 평생 어린 시절 엄한 유학 집안이었던 친정에서 몸에 익히신 가풍대로 조상을 잘 섬기고,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철저하게 지키며 사시는 분이셨다. 그런 분께서 자식들에게도 먹이지 못하는 쌀을 시주를 하신 속뜻은 이제 와 헤아려보면 자식들이 잘되게 해달라는 염원이었을 게다. 시주를 받은 스님은 그 뜻을 익히 헤아려 내 손금을 보아주셨던 것이었을 테고. 사실 그 후 어디에서도 손금이나 점을 본 적이 없다. 

규방의 규수, 의원 집 며느리 되다

올해로 어머니께서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지 15년이 되었다. 15년 전 겨울, 어머니의 유택이 될 구덩이 앞에서 하관을 막으며 하염없이 울었던 나도 어느새 90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나는 ‘어머니’라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 온다. 물론 세상 모든 자식들이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 마흔에 혼자 되셔서 3남 4녀를 키우시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시고 7남매 모두 세상에 이롭게 키우신 내 어머니를 뉘에 비교할 수 있으랴.

내 어머니 나삼례(羅三禮) 여사는 나주 나씨 엄한 양반 집의 1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나셨다. 셋째 딸은 선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말처럼 어머니도 미인이신데다 키도 크셨다. 어머니가 영암의 의원 집에 시집을 오신 것은 당신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조선 연산군 조 무오사화 때 목숨을 잃은 신진사림 김일손(金馹孫)의 후손(나는 김일손의 20세 손이다)이지만,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김일손의 유훈을 대대로 지켜온 집안의 어른이었던 할아버지께서는 의원을 하시면서도 이재에 밝으신 분으로 양곡 배급 대행 등을 하시는 실용파이셨다. 가풍의 차이로 갓 시집와서는 적응이 힘들기도 하셨지만 어머니께서는 시집살이를 잘 견뎌내셨던 것 같다. 하긴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좇는 것이 여자의 도리라고 배우신 양반가의 딸이셨으니 어련하셨겠는가.

넉넉한 인품과 굳은 의지를 지닌 여장부

어머니는 시집오던 이듬해에 낳으신 나를 비롯해 슬하에 3남 4녀를 두셨다. 의원 집 외며느리로 부족함 없이(비록 남편은 한량인데다 시어머니와 넷이나 되던 시누이들의 시집살이를 하긴 했지만) 살아오시던 어머니의 삶에 시련이 닥친 것은 당신 나이 마흔이 되던 해다.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로 집안의 기둥이었던 시아버지와 남편이 잇달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가업이었던 의원을 이을 만한 자식도 없었고(그때는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전쟁통에 양곡 대행소도 없어진 마당이었다. 규방의 아낙으로 바깥일이라곤 장에도 한 번 안 다녀본 양반댁 아씨였던 어머니께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마냥 울고 앉아 있을 수만도 없었다. 아직 학업 중인 아이들이 일곱이나 되었고, 봉양해야 할 시어머니도 계셨었다. 어머니가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곤 그나마 남아 있던 농토를 가꾸는 일뿐이었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이었다. 다음 추수까지 소요되는 자식들의 학자금이며 생활비를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던 어머니는 일단 다음 추수를 기약하며 빚이라도 내야 했고, 일꾼을 들여 농사를 지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여인네로서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추수를 해도 나라에 받쳐야 하는 세금이며 갚아야 할 빚을 제하면 다음 추수까지 가용(家用)이 빠듯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3년 상을 빈틈없이 정성껏 치렀다. 

놀랄 만한 일은 추수를 끝낸 어느 비오는 날의 광경이다. 추수한 볏가리를 논에 비가림 없이 쌓아놓았는데, 갑자기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느새 동네 사람들이 도롱이를 입고 각자의 집에서 비를 가릴 것들을 들고나와 우리 볏더미의 비가림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당장 내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시절이었다. 놀란 눈으로 서 있는 내게 동네 사람 하나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다 자네 어머니 덕이네.”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인 즉, 할아버지 생존해 계시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곡 대행업을 겸업하던 의원댁 외며느리였던 어머니께서는 해마다 설과 추석 명절이면 쌀 한 됫박 남짓을 동네 집집마다 나누셨다는 것이다. 보리도 귀한 시절, 명절에 어머님이 나누신 쌀은 조상을 위한 차롓상에 메가 되기도 했고, 배를 곯고 있던 아이들의 귀한 밥이 되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때의 고마움을 혼자되셔서 어렵게 농사를 짓고 계시던 어머니께 되돌려드린 것이었다. 새삼 내 어머니가 얼마나 넉넉하신 분인가를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한마디의 엄한 말로 자식의 잘못을 꾸짖으시다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에게 곰살맞은 애정을 보여주신 분은 아니셨다. 남편의 바람기마저 모른 척하시던 대범함(물론 남몰래 얼마나 속을 태우셨겠는가만 겉으로는 대범하게 모르쇠 하셨다)은 자식들에게 베푸는 사랑에도 나타났다. 자잘 자잘 잔소리를 하지는 않으셨지만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교육하시는 데는 엄하기 그지 없으셨다. 나는 열대엿 살부터 외지생활을 했던 터라 어머니의 꾸중을 그리 많이 듣고 자란 편은 아니다. 그러나 마흔 중반에 어머님으로부터 호된 꾸중, 그것도 딱 말 한마디를 들은 적이 있다. 

충남방적에 근무할 때였다. 발령에 따라 지방 근무를 해야 하던 시기라 아내와 아이들은 서울에 정착하고(아이들의 학업 때문에 함께 이사를 다닐 수 없었다), 나는 대전에 혼자 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혼자 사는 아들이 염려스러우셨던지 농한기를 빌려 “밥이나 해주마”시며 대전 내 집에 몇 달 함께 머물고 계셨다. 어머니께서는 늘 퇴근하는 나를 기다려 저녁을 함께 하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들과의 회식이 있었는데, 그만 어머니께 저녁을 먹고 들어간다는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아홉 시쯤,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다. 문을 열고 그만 아차 했다. 식탁에 저녁이 차려진 채 어머님께서 앉아 계셨던 것이다. 늦게 들어간다 혹은 저녁을 먹고 들어간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던 당신께서 아들이 들어오면 함께 드시려고 저녁을 안 드시고 하염없이 기다리신 것이다. 아니면 연락도 없이 늦은 아들을 경계하시려 일부러 저녁을 안 드시고 기다린 것일지도 모른다. 늦게 들어오는 나를 보고 그때서야 상을 치우시던 어머니께서는 “많이 배운 사람은 이러는 건가?” 딱 한 마디를 하셨다. 

순간 가슴이 턱 막혔다. 어머니께서는 자식을 기다리며 많이 배운 자식이 늙은 에미를 무시하나, 내가 자식을 함께 사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으로 키웠나 등등 오만 가지 생각을 하신 것이다. 여러 마디의 훈화보다 따끔한 한마디였다. 그 후로 나는 어머니께도, 식구에게도 나의 행선지와 귀가 시간에 대한 연락을 잊지 않았다.

“내 아들이 공학박사여!”

어머니께서는 말년까지 끝끝내 자식들과 함께 사시길 거부하셨다. 고향의 땅을 가꿔야 하신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내 육신 움직거릴 수 있는데 왜 자식들에게 신세를 지고 눈치를 봐야 하냐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사실 어머니는 건강 체질이셨다. 아마 외가 쪽 내림인 듯한데(내 이모들께서도 백수를 누리시고 계신다), 이 건강 DNA는 우리 형제들에게도 그대로 유전이 돼 나도 동생들도 칠십이 넘은 막내까지 아픈 데 없이 건강하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귀한 자산 중 하나다. 그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이태 전 치매에 걸리셨다. 처음에는 내 집으로 모셨지만 치매 노인을 돌볼 여건이 되지 않았다. 지금처럼 재가 요양보호사가 오는 것도 아니고 아내도 어느새 칠십이 넘은 나이였다. 할 수 없이 요양시설로 모시고 주말마다 찾아뵈었다. 하루하루 어머니는 노쇠해지셨고 기억도 흐릿해지셔서 마침내는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럼에도 면회를 갈 때마다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내 아들이 공학박사여!” 어머니 평생에 내가 공학박사였던 것이 자랑거리였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이런 것으로라도 효도를 할 수 있어서 다행 아닌가.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음력 12월 25일, 섣달그믐을 며칠 앞둔 엄동설한이었다. 향년 96세, 마흔의 젊은 나이에 혼자되셔서 자식 일곱을 키워내신 내 어머니는 춥디추운 날 소천하셨다. 50년을 넘게 외롭게 고군분투하신 삶이 너무 안타까워 어머님을 보내드리기 힘겨웠다. 하관하려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30분을 하관하려는 관을 붙잡고 울었다. 당신 평생이 안타까웠고, 이제 보내드리면 다시는 못 뵙겠구나 하는 마음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몇 년 있으면 나도 어머님 나이가 된다. 부모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애라고, 망백(望百)의 나이에도 나는 어머니가 너무 그립다. 살아생전 어머니를 다시 뵐 수 있다면, 못다한 효도라는 것을 한번 해볼 수도 있으리라.

“늘 당당하고 의자가 굳으시던 나삼례 여사님, 당신의 맏아들이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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