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02) 전방후원형 고분 재론(상)

 

지난해 12월 3일 ‘광주–강진’ 간 고속도로 제5공구 건설 현장인 나주 봉황면 유곡리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3일 ‘광주–강진’ 간 고속도로 제5공구 건설 현장인 나주 봉황면 유곡리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나주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 고분

지난해 12월 3일 공사 중인 ‘광주–강진’ 간 고속도로 제5공구 건설 현장인 나주 봉황면 유곡리 일대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일명 장고분)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광주-강진 간 고속도로는 총연장 88.61㎞로 오는 2024년 목표로 공사가 한창이다. 나주시를 통과하는 18㎞ 구간 중 봉황면이 가장 많은 11㎞(60%)를 차지한다. 

필자도 현장을 아직 가보지 않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농경지 한 가운데 솟아 있으며, 평범한 작은 동산처럼 보인다. 규모는 정상부에서 아래까지 길이만 50여m에 달할 만큼 거대하다. 문화재청이 주관하여 현장 조사한 결과, 해당 유적은 5~6세기 무렵 축조된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확인되었고, 다행히 도굴 흔적도 없다고 한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앞쪽은 사각형 모양이고 뒷부분은 시신이 안치된 석실 봉분 부분을 둥글게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양식의 고분이 영산강 유역에 주로 집중되어 있는데 이번에 확인된 고분이 전방후원형 고분이라고 하면 국내에서 확인된 15번째에 해당한다. 나주 행정구역에서 처음 확인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고대 마한의 영역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할 뿐, 현재의 행정구역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본다.

문화재청 매장문화재 분과위원회에서 지난 1월 19일 논의된 내용은 유적이 소재한 봉황면 유곡리 일대 4천176㎡ 전체를 현지 보존하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고속도로 선형도 문화재 원형 보존을 위해 유구(遺構)와 최장 73m 이격시키고, 5, 6공구 전체 도로 선형은 최장 2.3㎞변경안이 제시되었다. 이 같은 안대로 결정되면 이미 40% 가량 진행된 공사를 설계 변경하고 절차를 다시 진행하면 전체 완공 시기도 2024년에서 2년 정도 늦어지게 된다고 한다.

이번 호에 다시 장고분, 즉 전방후원형 고분을 다시 살피려는 까닭은 전방후원형 고분이 확인되었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어 이를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전방후원형 형태의 고분만 나오면 바로 그것을 일본 세력이 이 지역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는 습관이 있다. 

지난해 국립나주박물관에서 학술세미나를 하고 보고서까지 작성한 대표적인 전방후원형 고분이라고 할 수 있는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사례에서 우리 지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피장자의 성격 등이 상당히 드러나 그동안 왜 세력과 관련하여 설명한 주장들이 잘못임을 확인한 바 있다. 

필자 또한 전방후원형 고분에 대해 본란을 통해 자세히 언급한 바 있지만, 아직도 전방후원형 고분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다. 실제, 이번 나주 봉황리에서 확인된 전방후원형 고분에 대한 기사가 나오자 영암의 여러 관심이 있는 분들께서 필자에게 이에 대해 문의를 하기도 하였고, 역사에 관심이 있는 교육자도 왜 전방후원형 고분만 보이면 왜와 연결시키려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소연하였다. 

이에 필자는 본란을 통해 다시금 전방후원형에 대한 현재 학계의 인식 및 필자의 생각을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번 나주 봉황면 유곡리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확인되었듯이, 마한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영암지역 곳곳에는 이러한 마한 유적이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이 필요하다.
 
백제와 왜의 교류 주장은 재검토돼야 

백제가 고대 일본의 문화 발달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한국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통설이다. 현재 일본의 한 신궁에 보관된 ‘칠지도’가 4세기 후반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인 것처럼, 고대 일본과 백제는 문물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일본에서 출토된 많은 한반도계 유물들을 분석한 경북대 박천수 교수는 3세기부터 5세기까지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의 중심은 가야이고, 백제와의 교류는 6세기 초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저자 역시 백제와 왜의 관계가 기존 이해처럼 매우 긴밀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한 남부연맹을 이끌었던 해남반도의 ‘침미다례’와 나주 반남·영암 시종의 ‘내비리국’ 등이 반도 서남부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제가 서남해 연안항로를 통해 왜와 자유롭게 교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일본서 집중 출토되는 영산강식 토기

6세기 중엽 마한 남부연맹과 백제가 통합된 이후 백제와 왜의 교통이 본격화되었을 것이고 그 이전의 왜와 활발한 교류를 한 집단은 마한 남부연맹이라고 살피는 것이 온당하다. 곧 4세기 후반에 전남 남해안 일대가 백제의 지배에 들어갔다는 기존 인식과 달리 5세기까지도 이 지역 연맹왕국들이 마한 남부연맹을 형성하며 독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백제와 왜’가 아닌 ‘마한 남부연맹체와 왜’로 바꾸어 생각해야 한다. 최근 일본에서 발굴·조사된 유적과 유물에서 영산강 유역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는 것은 한, 일 양국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이를테면, 니시신마치(西新町)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들, 이른바 평행 타날문 토기를 비롯하여 이중구연호, 양이부호 등이 영산강식 토기였다. 물론, 장란형 토기나 주구 토기처럼 또 다른 영산강 유역의 주요한 기종들은 출토되지 않고 있어, 당시 왜가 토기 기종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이 지역의 주요 토기들이 일본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영산강 유역 토기 편년에 대해 대체로 3세기 중엽~4세기 중엽이라는 데 의견이 많다. 니시신마치 유적에서 출토된 부뚜막 역시 영산강 유역과 비슷한 장방형의 평면 형태를 띠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말(馬)뼈가 원형 그대로 출토된 시토미야키타 유적에서 발굴된 U자형 부뚜막 또한 전라도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이처럼 근기(近畿) 지역에서 출토되는 한반도계 유물 가운데 영산강 유역과 관련이 깊은 유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영산강 유역 문화가 이 지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게 한다. 반면, 근기 지역에서 백제 중심지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이는 당시 백제와 왜의 교류가 영산강 유역 연맹 왕국에 가로막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을 반영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토착문화에 묻어 있는 일본문화 요소

한편,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 가운데 왜계 요소가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국보 295호로 지정되어 더 유명해진 반남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보주가 달린 3단의 가지 장식에서 가야계 요소와 더불어 왜계 요소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인 ‘하니와’ 또한 재지적인 특징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영산강 유역에서 왜계 요소가 보이고, 일본에도 영산강 지역 문화 요소가 보이는 것은 두 지역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말해준다. 영산 지중해 연안의 남해만 일대에 아직도 남아 있는 남해포·수문포·당두포·배나루 등의 고대 지명을 통해 그곳 포구들이 과거 마한 연맹 왕국 시절 대외교역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대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점술인 ‘복골’ 유물이 남해만의 수문 패총과 함께 해남 군곡리 패총, 광주 신창동 유적 등 영산강 유역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다. 

해남 군곡리가 낙랑과 가야를 연결하는 중개무역 중심지였다면, 영산강 내해인 남해포와 수문포 등 삼포강 유역의 여러 포구들이 영산강 뱃길로 영산강 중·상류 즉 광주 신창동 일대까지 연결해주는 관문 역할을 한 셈이다. 여하튼, 4세기 후반 오사카 분지를 중심으로 야마토 왕권을 성립시켰던 왜 왕조와 영산강 유역의 내비리국 등이 인적, 물적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영암 상대포에서 출발했다는 왕인 박사 일행의 도왜(渡倭)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의 연맹 왕국들은 주변국과 활발한 문물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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