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중 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수필가
신 중 재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수필가

금년 1월부터 ‘한국전쟁 희생자 영암유족회원’들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일을 보면서 영암군 학산면 상월교회의 원로장로님의 증언을 들었다.

한국전쟁 때, 영암 상월교회는 목회자, 장로, 집사, 성도들의 뜨거운 신앙생활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날마다 교회에 모여 찬송, 기도, 예배를 드리며 영혼 구원을 위해 전도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뤄갔다. 그때, 빨치산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금지시키고, 건물을 헐어 불태우며, 일부는 방공호를 구축했다. 그러나 신◌◌ 전도사와 성도들은 비밀리에 예배를 계속했고, 서로 격려하며 국군 수복을 기다렸다. 전세가 빨치산들에게 불리해지자 최후의 발악을 하며 주민들을 더 괴롭히고, 지주, 지식인,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증언에 의하면 “서◌◌ 집사는 순교를 위해 금식기도를 하며 성도들에게 순교를 각오하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도록 권면했다”라고 했다. 1950년 11월 6일은 가을걷이를 하느라 지친 몸으로 곤한 잠을 자던 성도들을 그 동네의 아는 사람을 시켜 한 명씩 불러 빨치산들의 본거지에 감금했다. 잡혀 온 사람들의 두 손을 뒤로 결박하고, 서로 대화도 못하게 했다. 먼저 불려온 임◌◌ 집사가 나중에 잡혀 온 손자를 보며 애절한 눈빛으로 볼을 비비며 이 세상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데, 빨치산들은 그를 구타하며 그 행동을 못하게 했다. 

어둠이 깔리자 어디론가 성도들을 끌고 갔다. 외삼줄(삼나무 껍질로 꼬아 만든 줄)에 두 손이 묶인 채,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항거하지 않았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낮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맘 가지고 가겠네, 믿는 자들을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님, 예비해 두셨네.” 찬송하고 소망을 부여잡으며 죽음 앞에 굴하지 않고 형장에 도착했다.

죽음 앞에 대담한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학대받고 천대 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야 53장 7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언한 말과 같았다.

예리한 죽창과, 서슬 퍼런 도끼와 삽을 든 빨치산들, 그러나 순교의 길을 걸어가기로 작정한 그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기도할 시간을 요청하여 가해자들과 지역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들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죽창에 찔려 죽으면서도 아멘! 아멘! 하였고, 뱃속에 아이를 위해 영혼을 부탁하며 죽어간 어미의 심정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목회자들이 죽어가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이 교회 순교자들의 정신을 높이고 계승하며 보존하는 마음으로 뜻을 모아 순교자 35명의 명단을 순교비에 기록하여 1993년 세워, 매년 11월 첫 주를 순교기념 주일로 지키고 있다.

당시 광주 양림교회 박◌◌ 목사와 그의 부인, 외아들, 장모도 고향에 피신해 왔다가 순교했다. 빨치산들이 자기 집의 어린 식모를 포박하려고 하니 “저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으니 대신 내 아들을 잡아 가시오.”라고 했다. 

600만 명 유태인 학살사건 때,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소.”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막시말리아노 꼴베 신부는 자원하여 처자식이 있다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처형자를 대신하여 죽음을 택했다.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친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를 몸소 실천한 성인의 죽음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순교자였다.

나는 지금 이웃을 위해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나는 지금 벗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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