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99) 남해포와 남해신사(下)

상대포 / 구림의 상대포는 조선 후기 지리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 영암의 큰 동네로 구림촌을 꼽고, 무역항으로서 역할을 기록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 해상왕 장보고가 당에 건너간 항구도 구림 상대포였다.                  
상대포 / 구림의 상대포는 조선 후기 지리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 영암의 큰 동네로 구림촌을 꼽고, 무역항으로서 역할을 기록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 해상왕 장보고가 당에 건너간 항구도 구림 상대포였다.                  

 

2022년 무인년이 밝았다. 이른바 ‘마한 특별법’이 시행된 지 햇수로 2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된 원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영암은 물론이지만, 나주는 말할 것 없고 함평도 마한 예산이 대폭 늘어나 바야흐로 지자체별로 마한을 연구하는 붐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영암은 현재 우리나라 남해를 지키는 제3함대 사령부가 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한 이래 이 지역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지난 호에 남해신사가 마한 시대부터 있었을 가능성을 거듭 확인하였다. 오늘은 지정학적으로 이 지역이 지니는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려 한다. 

장흥창(長興倉)과 덕진 나루

영암이 월출산의 북녘인데도 읍 터로 꾸며진 것은 덕진만이 열려 있어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라 한다. 영암천 유역의 들은 해발고도가 10m 미만으로 질펀하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조수(潮水)가 도달하여 수심이 3m나 되는 바닷길이 형성되었다. 덕진이 중요한 항구였다는 것은 고려 때 덕진만에 국가에 세곡을 모아 바치는 조운창이 설치되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고려는 건국 초에 13개의 조창(漕倉)을 설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전남에 조창이 4개나 있었다. 당시에 전남이 중앙 정부의 중요한 재정기반임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2개가 영산강 유역에 있었는데, 나주 금강안의 치을포에 설치된 해릉창(海陵倉)과 영암 해창리 신포의 장흥창(長興倉)이 그것이다. 장흥창은 단순한 창고가 아니라 행정구획의 하나로서 독자적인 영역과 치소(治所)가 있었다. 덕진나루와 해창교 사이에 해당하는 군서면 원해창 마을이 장흥창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덕진은 영암은 물론 강진, 해남, 장흥 등지의 상인이 몰려들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암의 문호이자 외항의 역할을 하였다. 

덕진만은 월출산과 주변 산등성에서 흘러 내려온 토사로 점차 매립되어 수심이 얕아지자 다리가 놓였다. 덕진면 내촌마을 영암천 변에는 대석교창주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라고 하여 높이 150cm, 너비 62cm 크기의 빗돌이 비각 속에 있다. 이 돌비는 덕진 여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13년 건립되었다 한다. 덕진이란 원래 큰 나루라는 의미를 지닌 지명이다. 목포로부터 뱃길이 닿는 포구지만 영암과 나주를 왕래하는 곳으로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 

국제항의 상대포

구림의 상대포는 이미 왕인박사의 도일 전승이 있는 곳으로 보아 이곳에 국제항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침 조선 후기 지리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의 전라도 편에서 영암의 큰 동네로 구림촌을 꼽고, 무역항으로서 역할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에 들어갈 때는 모두 본군 바다에서 배가 떠났다. 하루를 타고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이 섬에서 하루를 타고 가면 홍도에 이르며, 또 하루를 타고 가면 가거도에 이르고, 여기서 북동풍으로 사흘을 타고 가면 곧 태주 영파부 정해현에 이르고, 만약 순풍이면 하루에 이른다. 남송이 고려와 통하는 데도 정해현 해사에서 배를 출발시키어 7일에 고려 국경에 상륙했다. 그것이 곧 영암군이다. 당나라 때 신라인이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갔을 때도 강나루를 통하는 중요한 나루터와 같이 선박의 왕래가 계속되었다. 고운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는 모두 상선을 따라 당으로 들어가 당의 과거에 합격했다.” 

상대포가 당시 국제항임을 말해준다. 이 사료를 바탕으로 교과서에서도 통일신라말 대당 교역 항구로 영암을 지목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 해상왕 칭호를 받은 장보고가 당에 건너간 항구도 이곳이었다. 

한편 구림의 서편은 ‘서호(西湖)’라는 바다였다. 내륙 깊숙이 조수가 미치는 곳으로 일찍이 갯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장천리 선사 주거지, 엄길리 철암에 있는 매향비는 이곳 항구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짐작하게 한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곳이 삼포강 중·하류에 위치한 남해포이다. 남해포가 있는 넓은 영산 지중해를 남해만이라고 부르는 데 남해포가 그 중심에 있음을 말해준다. 시종의 외항 구실을 한 남해포는 영산강 하굿둑이 건설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목포에서 이곳을 종점으로 하여 여객선이 다녔고, 둑이 생겨 항구의 기능이 축소되었을 때인 1982년 당시까지도 어선 34척, 수산물 어획고가 32만 톤에 달할 정도로 항구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남해신사 터를 발굴했을 때 그곳에서 상평통보, 관영통보, 도광통보 등이 출토되었다. 상평통보는 조선 후기에 사용된 화폐, 관영통보는 일본 덕천가강 때 화폐, 도광통보는 중국 청나라 선종 대의 화폐로 모두 17~8세기에 사용된 화폐들이다. 

이처럼 동아시아 3국 화폐가 남해신사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곳 남해포가 조선 후기까지도 국제 무역이 이루어지던 중요한 항구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남해포가 그 이전에도 국제 무역이 이루어지던 항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남해만에 있는 남해포는 화려한 영산 지중해 역사와 역사적 궤를 같이하고 있다. 영산 지중해는 마한 시대부터 중국, 일본, 가야, 동남아시아 등 여러 지역과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항구 입구에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당이 일찍부터 존재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실제 유물로 확인되고 있는 전북 부안의 죽막동 제사유적도 마한 시대인 3∼4세기 그곳에 해신당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히려 항로의 중요도로 따지면 남해만은 변산반도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곧 남해만의 중심항구인 남해포에 있는 해신당은 마한 시대에 있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남해신사의 기원을 마한 시대로 끌어 올려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남해만의 중심항구 남해포

마한 시대 이래부터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산과 바다, 그리고 강에 나라를 보호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으며, 중요한 장소에 신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삼국시대의 오악(五嶽),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악(嶽)·해(海)·독(瀆)의 신앙 개념이 그러하였다. 이 가운데 해양신앙과 관련하여 영암의 남해신사, 강원도 양양 동해묘, 황해도 풍천의 서해단 등이 대표적인 사당이다.

신사(神祠)는 신당(神堂)과 흔히 혼용하여 사용하는데 사전적 의미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신사(神祠)는 한국에서 신령을 모시는 곳이며, 신사(神祀 천신에 대한 제사)를 하는 곳으로, 영사(靈祠)라고도 한다. 신당(神堂)은 민간신앙에서 신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집을 말한다. 신당의 종류로는 굿당, 용신당, 산신각, 동제당 등이 있다. 

남해신사는 남해신사(南海神祠), 남해당(南海堂), 남해묘(南海廟), 남해사(南海祠) 등 여러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남해신사(南海神祠) 또는 남해당(南海堂)이라는 공식적 용어로 기록에 나오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에 남해신사라 표기되어 있고, 인조 23년에는 남해당이라 표기되어 있다.

남해신사 대신 남해당이라는 용어가 나오게 된 데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는 분위기와 관련이 있지 않나 한다. 고려 현종 때 남해신사에 제를 올리는 의식이 국제로 된 이후 조선 전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을 때는 ‘신사’의 명칭이 사용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국제(國祭)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신당’의 의미인 ‘남해당’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사’라는 명칭 대신 악(嶽)·해(海)·독(瀆)으로 구분하여 ‘남해(南海)’로만 표기하여 치제(致祭) 설명만 하였다.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지어진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 복거(卜居)에 있는 “신사(神祠) 근처에 살림집을 지으면 좋지 않다”고 적혀 있다. 조선 후기에 쓰여진 저술에 ‘신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홍만선이 이 책의 저술 의도가 성리학적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어서 원래의 명칭을 담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조선 후기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면서 해신당에 대한 국가의 관심이 약화되면서 그 명칭의 변화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해신당 명칭이 있는 고지도에서도 확인된다.

1530년에 나온 팔도총도(八道摠圖)에는 남해신사와 동해묘, 서해단을 ‘남해신사’, ‘동해신사’, ‘서해신사’라고 하여 ‘신사’라고 표기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 19세기 초의 광여도. 1872년 지방도, 그리고 여지도에 표기된 해신사의 지도에 ‘남해신사’를 모두 ‘남해당’이라 표기하였다. 조선 후기에 명칭의 변화가 일어나 남해당으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일부에서 남해신사의 신사(神祠)를 일본의 신사(神社)와 혼동하여 일부러 ‘신사’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하는 데 그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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