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기 중 /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전남에너지고 교사
김 기 중 /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전남에너지고 교사

“책 속에 길이 있다.” 어릴 적 큰 형 자취방 책상머리에서 처음 접했던 말이다. 그 이후 줄곧 책 속 삽화나 행간에서 ‘길’을 찾고자 했다. 저학년 때는 그림이나 사진 속 신작로나 오솔길을 찾다가, 고학년이 되자 추리소설의 사건 실마리나 문학 작품 속 주제나 교훈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책 냄새와 친해졌다. 새 책 종이가 갓 볶아 낸 모카 향기라면, 누렇게 빛바랜 헌책들은 해묵은 된장처럼 구수했다. 책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 학교 도서실은 정원보다 향기로웠다. 행간의 의미나 교훈을 머리로 인지하고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종이 냄새를 몸으로 느끼며 보내는 시간 자체가 좋았다. 책장을 넘길 때의 쾌감이 좋았고, 그 재미를 맛보기 위해 딱딱하거나 재미없는 대목에서는 두세 장씩 건너뛰기도 했다. 그 시절 읽었던 책 중에도 ‘암굴왕’과 ‘아아무정’이라는 제목이 가장 기억난다. 훗날에야 이 책들이 19세기 프랑스 사회 동시대를 살았던 두 거장 ‘뒤마 페르’와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 ‘몽테 크리스토 백작’과 ‘레 미제라블’이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찼던 기억 또한 새롭다.

보도에 따르면, 2020년 대한민국 전체 성인의 약 40%가 1년에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한다. 하기야 인터넷상의 소식과 정보들을 열심히 보고, 듣고, 읽고, 쓰면서 퍼 나르기에도 바쁜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내 뇌리에서 사라지는 수많은 데이터들을 과연 종이책이 주는 행복에 비길 수 있겠는가? 냄비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다 차갑게 식기를 반복하기보다 근력과 지구력·유연성을 고루 갖춘 삶의 기초 체력을 길러 줄 수 있겠는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삶이 아니라, 국도변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 가을걷이가 끝난 쓸쓸한 시골 들판에 서서 귓가에 맴도는 찬 서리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제는 노래방 가사에만 기대지 말고 그 시절 7080 노래들을 따라 적으며 익혔던 경험으로 새롭게 ‘내 노래’를 불러보자.

임인년 새해 첫째 주를 보내며 종이 책과 친해지리라 다짐해본다. ‘나는 내가 먹는 것’이듯이, ‘나는 내가 읽고 기록한 것’이리라. 그것은 바로 인류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온, 그리하여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앞에 서 있는 역사·문학·철학·예술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고전 들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아버지 격인 철학 서적들을 벗 삼아보자. ‘철학’은 딱딱하고 어렵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데려와 보자. 이름부터 헛갈리는 철학자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지 말고 우리 일상의 친구로 삼아보자. 그리하여, 코로나19 시대에 ‘집콕’하며 고독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이라면 ‘하이데거’에게 친하게 말을 걸어보자. “하이데거야, 나는 지금 불안한데, 너라면 어떻게 살겠니? 도대체 네가 말하는 ‘현존재’라는 것이 지금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니?”라든가, 밖에서는 꾹꾹 참다가 집에서만 시원하게 배변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나라 때 고승 ‘임제’에게, “스님, 불교의 가르침은 특별한 공부보다는 평상시에 일 없이 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것 뿐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에 정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하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기술은 우리를 자연에서 해방시키는가?” 이 두 질문은 작년 6월 치러졌던 프랑스 대입 자격고사인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 문제 중 일부이다. 우리나라 수능시험에 비견되는 ‘바칼로레아’는 변별력을 중시하는 오지선다형 우리 수능시험과 달리, 논술·구술·전공·필기 등 세 유형의 대입 자격시험이다. 그중에서도 장장 네 시간에 걸쳐 치러지는 철학 논술시험은 가장 비중이 높고 전 수험생의 필수 과목이므로 언론과 국민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수험생들은 각각 세 개의 논술 주제와 한 개의 텍스트 해설 등 총 네 개 중에서 택일하여 네 시간 동안 A4 용지 예닐곱 장 분량으로 자신만의 논지를 펼쳐야 한다. 위 첫 번째 질문은 인문계 철학시험 제3주제이고, 두 번째는 이공계 철학시험 제3주제이다. 이공계 문제도 다분히 철학적 사고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문계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읽기·쓰기·토론하기보다 객관식 ‘정답맞히기’에 익숙해진 교육풍토로 볼 때 과연 얼마나 많은 고교생들이 합당한 논거를 들어가며 자신만의 논지를 펼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주어진 논술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서관에 들락거리며 필요한 고전들을 섭렵하는 훈련이 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올해부터 영암공공도서관 신축이전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차분하게 설계공모 기간을 거쳐 2024년 9월에 개관할 예정이라고 하니 우리 지역으로서는 대형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건축 면적은 3천900㎥, 지상 3층 규모이니 자못 기대가 크다. 이 공간에서 남녀노소 우리 영암 군민들이 책과 함께 일상의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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