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98) 남해포와 남해신사(上)

지역에서 일고 있는 마한 붐

마한을 사랑하는 많은 영암군민의 도움으로 영암지역의 마한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세미나가 두 차례에 걸쳐 끝났다. 세계유산 등재는 우리에게 ‘꿈 같은 소리’라고 비아냥거릴 수 있다. 하지만 꿈을 갖게 되면 꿈은 이루어진다. 물론 꿈을 이루기 위한 절박함이 수반되어야 한다. ‘절박’이라는 단어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가령, 내년 대선에 어느 후보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는지를 필자는 본다. 나주 한전공대 유치가 더 중요할까, 장성 국립심혈관센터 건립이 더 중요할까. 국립심혈관센터는 문재인 정부의 광주전남 대선공약 3대 공약의 하나이다. 임기 5년이 끝나간다. 착공 계획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같은 3대 공약의 하나인 한전공대는 지금 신입생 모집 중이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인데 그것은 우리의 현재 역량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한도 마찬가지이다. 마한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전남도지사가 절박할까, 나주시장이 절박할까, 영암군수가 절박할까. 누가 절박한 마음으로 덤비고 있는지 필자는 보고 있다.

필자는 이번 세미나를 준비하며 영암을 포함한 우리 지역의 마한유산이 세계유산의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그것을 우리가 활용하는 것이 지역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것의 성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마한 전도사가 되어 영암뿐만 아니라 나주, 무안, 강진, 함평 등 여러 지역을 다니고 있다. 각 지역에서 마한 붐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세미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호에 하려 한다.

남해신사와 마한의 관계

오늘은 최근 남해신사가 마한과 관계가 없다는 일부의 이야기가 있어 다루고자 한다. 논쟁하자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사실, 남해신사와 마한의 관계는 영암의 마한을 넘어 마한 전체를 살펴서도 매우 중요하다. 마한과 남해신사를 집중적으로 살펴왔다. 본란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필자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사실, 마한사는 기록이 그리 많지 않다. 더욱 마한과 남해신사를 연결하는 직접적 증거 없다. 그렇다면 마한과 남해신사를 연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와 근거가 있다. 말하자면,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맞추다 보면 마한 이래 조선 후기까지 국제항의 기능을 한 남해포에 배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당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산강 하류에는 일명 ‘남해만’과 ‘덕진만’이라고 불리는 넓은 만이 형성되어 있었다. 남해포 앞바다에 넓은 영산 지중해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전라도 고지도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결빙이 안 되고, 상·하류 강바닥의 높낮이 차이가 크지 않아 유속이 느리며 조수의 영향을 받아 뱃길로서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영산강의 하류는, 썰물 시 갯벌과 갯고랑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서해안 바다로, ‘남해만’이라 칭하던 내만(內灣)이 형성되어 그곳을 중심으로 많은 항·포구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영산강 중류는 조수가 영향을 미쳤던 구간으로 강상(江上) 포구가 존재하였다. 조수에 따른 감조 상·하한은 나주대교 기준 상하 5㎞, 즉 만봉천 합류 지점-원가 마을에 이른다. 다시들 일대의 중심 항구였던 회진까지도 대형 선박(海船)들이 다니는 뱃길이 열려 있었다. 문헌 기록으로 보면 해선들이 영산창 일대까지 올라온 것이 확인되고 있다. 게다가 다른 내륙의 평야와 달리 하천 부유물과 퇴적물 유입이 증가함으로써 하상보다 높아져 조수(潮水)의 영향을 받지 않은 비옥한 노출 간석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이 간석지를 토대로 형성된 비옥한 토지는 이곳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하였다.
 
연안 항로의 주요 교역로

남해포가 있는 시종 지역의 풍수는 낙지 형국으로 발가락 사이는 조수(潮水) 구간의 골이었다. 갯골을 따라 배 닿기 쉬운 곳은 포구가 설치되고, 부근 둔덕 밑에는 큰 동네가 형성되었다. 시종 관내에 100기가 넘는 고가(古家)들의 분포로 보아 고대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졌다. 

삼포강 유역은 영산 지중해 내해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꼽을만하다. 구석기 유적부터 간석지 개간까지 오랜 기간 선인들의 삶을 살필 수 있는 곳으로 영산강의 축소판과 같다. 이곳은 영산 지중해 중에서도 깊숙한 위치로 주변 땅이 유수의 침식에 약한 붉은 색 황토 풍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다른 곳보다 빨리 매립되어 이미 서기 전에 비옥한 평야와 갯골이 형성되었던 삼포강 만(灣)은 하류 쪽으로의 흙모래의 이동이 계속되어 들이 넓어졌다. 이 지역은 한편으로는 갯물의 유입도 이루어져 갯골 사이로는 배들의 출입이 가능하여 주변 지역인 영산 지중해는 물론 서남해까지의 연결이 가능했다. 

한반도 서해는 해류가 미약한 대신 조류가 발달하였고, 남해에서는 외해에서 해류가, 해안 부근에서는 조류가 강하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대방에서 왜에 이르는 항로가 (낙랑·대방)군→서해안→한국(韓國)→남해안→구야한국(가야)→대마도→왜라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낙랑과 대방이 변한에서 철을 수입하였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서남해의 연안 항로가 주요한 교역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서남해 연안 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데다 영산 지중해의 초입에 위치한 영암은 일찍부터 항구가 발달했다. 그 가운데도 덕진, 상대포, 남해포가 주목된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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