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건국포장 1명, 애족장 1명, 대통령 표창 23명 등 영암 출신 25명이 독립유공자로 대거 포상을 받았다. 지난 8.15 광복절에 포상을 받은 2명을 포함하면 올해 모두 27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셈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로 매년 11월 17일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찬탈당한 날인 11월 17일을 기억하기 위해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날을 기념일로 삼았다. 199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 정부 기관인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고 있다. 이로써 그동안 ‘영보 형제봉사건’에 연루된 40명이 항일운동 독립유공자로 추서돼 국내 단일사건으로는 최대 규모라는 점에서 영암의 항일운동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역사학자 박해현 교수는 최근 본지에 연재하고 있는 ‘새로 쓰는 영산강유역 고대사’를 통해 “최근 광주전남 학생운동과 관련한 판결문 번역 일을 맡았던 필자는 1928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학생운동을 한 인물들을 살필 기회를 가졌는데, 영암 출신들이 지역적으로 가장 많은 곳의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중략) 영보 농민운동은 1930년대 항일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위대한 항쟁으로 거듭 평가되고 있다. 이는 개방성과 포용성에 바탕을 둔 영암의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외부의 압력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영산 지중해 초입에 있는 영암의 지리적 위치는 마한시대 이전부터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영암의 정체성’으로 발현됐다고 주장한 박 교수는 주민들 스스로 6.25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구림 ‘용서와 화해의 탑’, 영암 의병의 상징인 국사봉의 ‘호남의소’,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을 선도했던 영암 청년학도들에 이어 영보 농민운동(형제봉사건) 등은 ‘영암의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외부의 압력을 단호히 거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영보 농민운동은 1930년대 항일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위대한 항쟁으로 거듭 평가되고 있다고도 했다. 마한의 심장 영암, 그 후예들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이번 순군선열의 날을 맞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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