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92) 마한의 심장, 영암을 답사하다(上)

시종 내동리 쌍무덤과 발굴된 옥구슬 /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마한사람들은 옥(玉)을 금은(金銀) 보석보다 귀중하게 여긴다”고 언급되고 있는데, 시종 내동리 쌍무덤에서 출토된 수많은 옥 구슬(아래 사진)은 이곳이 마한의 중심지였고 마한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시종 내동리 쌍무덤과 발굴된 옥구슬 /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마한사람들은 옥(玉)을 금은(金銀) 보석보다 귀중하게 여긴다”고 언급되고 있는데, 시종 내동리 쌍무덤에서 출토된 수많은 옥 구슬(아래 사진)은 이곳이 마한의 중심지였고 마한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마한유산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필자가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영암은 자연환경, 인문환경이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러한 특성을 관광 자원화하여 지역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이때 지역이 지닌 정체성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트로트센터가 왜 영암에 있을까? 트로트 가수 1세대 대표인 하춘화가 왜 영암에서 태어났을까? 외지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필자는 이렇게 얘기하겠다. 
 

“전통음악에 새로운 음악 장르가 더하여 나온 장르가 트로트이다. 영암을 마한의 심장이라고 하는 까닭은, 기존 토착 문화에 새로운 외래문화가 융합되어 독창적인 마한문화가 영암에서 꽃피웠기 때문이다. 800년 넘게 형성된 마한의 DNA가 15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 영암에서 새로운 문화 ‘트로트’로 발현된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트로트 열풍에 빠진 까닭은 무엇일까?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건설한 대한민국 정체성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가 전통문화에 바탕을 두고 외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는 사실에 주목을 하였다. 바로 이때 트로트라는 새로운 장르가 주목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암에서 하춘화라는 대형 트로트 가수가 태어나고, 이곳에 트로트센터 및 가야금산조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마한을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해야 한다. 트로트를 마한의 역사성과 연결하여 영암의 새로운 관광 트랜드로 만드는 전략이 중요하다. 음악에 마한의 전통과 영암의 역사, 자연, 맛이 흐른다면 상상만 하여도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쌍무덤 국가사적 가치 충분하다 

필자는 마한 답사길을 안내할 때, 내동리 쌍무덤, 장동 고분, 상대포, 남해포와 남해신사, 태간리 자라봉 고분 등을 대표적인 마한 유산으로 소개한다. 오늘은 그 가운데 내동리 쌍무덤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쌍무덤에서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과 동일한 편이 나와 이 지역에도 반남의 정치 세력과 동일한 세력이 있음을 입증해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지난 7월 영암군이 주최한 쌍무덤을 국가사적으로 지정하려는 학술세미나가 열린 것도 이 때문이다. 

시종면 내동리 쌍무덤은 4기로 되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대형 고분인 1호분이 발굴조사 대상이었다. 길이 56m, 너비 33.6m, 높이 4∼7m의 제형(梯形)으로 된 고분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도굴되었고, 분구 주위에서 많은 구슬이 수습되었다. 쌍무덤은 목포대박물관이 1986년 지표조사를 하였고, 2000년 전남대 박물관이 측량하였다. 이번에는 전라남도 산하 전남문화재연구소가 2018년 5월 1호분을 시굴조사를 한 후, 2019년 4월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1호분에서 석실 1기, 석곽 3기, 옹관 1기가 확인되었고 분구의 남쪽 사면에서 옹관 1기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1호 석곽에서 광구소호, 발형토기, 단경호 및 다양한 구슬(곡옥, 다면옥, 구슬옥)과 금제이식이 출토되었다. 2호 석곽에서는 유공광구소호, 직구호를 비롯하여 다량의 구슬(곡옥, 채색옥, 금박유리옥)과 금제이식 4점, 영락(瓔珞 구슬목걸이) 1점이 출토되었다. 

특히 2호 석곽에서 금동관 대륜부 상부 장식에 사용된 유리구슬과 영락 등 금동관 조각편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장식용 유리구슬은 구슬의 3분의 2 정도 하단부에 금동으로 도금하여 대륜부에 해당하는 상부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사용한 흔적이 확인된다. 이는 나주 신촌리 9호분 금동관에 장식된 유리구슬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2019년에 이어 2020년 발견된 편(片)은 금동대관 둥근 테의 앞쪽과 양 측면에 나뭇가지 모양의 세움 장식 형태로 줄기 위해 커다란 꽃봉오리를 만들고 그 좌·우 가지에 2개의 꽃봉오리를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었다. 영락에 이어 나뭇가지 모양의 편이 확인됨으로 인해 이 고분에 신촌리 9호분 것과 동일한 금동관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에 주구에서 출토된 형상식륜(形象埴輪: 동물모양 하니와)도 주목되었다. 형상식륜은 사슴 또는 멧돼지(?) 형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통형 토기는 중앙 돌대를 중심으로 상·하로 원공이 투공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기존의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와는 상반되는데 형상식륜의 기대 부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확인된 형상식륜으로는 이곳 내동리 쌍무덤과 함평 금산리 방대형 고분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상(말, 닭, 사람인면)이 있다. 

이렇듯 내동리 쌍무덤은 비록 일제강점기에 도굴의 피해를 입었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 나와 이번 발굴의 의미를 한층 높여주었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다시 정리한다. 아직도 꽤 많은 이들이 인터넷 상에 떠도는, 마한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부 학자의 견해를 바탕으로 이해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쌍무덤 유물은 독자적 마한왕국의 실체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은 백제 국왕이 사여한 위세품이 아니라 반남 지역에서 제작한 마한 국왕의 왕관이었다. 현지에서 제작된 금동관의 형식은 백제 계통이 아니라 가야와 왜 및 토착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마한 고유의 양식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일본에서 수입된 금송으로 만든 관(棺) 등도 이 지역 국왕의 존재를 반증해준다. 쌍무덤에서 신촌리 고분과 동일한 형식의 금동관 파편이 나왔다는 것은, 이 고분의 피장자도 신촌리 9호분의 피장자와 같은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시종과 반남 지역에 동일한 세력을 지닌 세력이 마한 연맹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추정을 입증해준다. 곧 두 지역 세력이 교대로 왕위에 선출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많은 ‘옥’(玉)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마한사람들은 옥(玉)을 금은(金銀) 보석보다 귀중하게 여긴다”고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 옥 유물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곧 마한을 상징하는 것이 ‘옥’이고 그 옥 문화의 중심지가 영산강 유역이라는 점에서 ‘옥’이야말로 마한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근거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쌍무덤 주위에서 널려 있는 구슬을 수습하였다는 증언과 함께 이번 발굴에도 수많은 구슬이 출토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마한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마한문화의 특질을 입증한 ‘하니와’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하니와’가 주목된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토괴 구조를 통해 영산 지중해를 통해 유입된 문화가 토착 문화와 용해되어 고유한 문화로 창조되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이번 출토된 하니와도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이 지역의 개방적이고 독특한 마한의 문화 특질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결국, 영산강 유역의 강력한 마한왕국이 한국 고대사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쌍무덤 출토 유물들은 거듭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동관의 주인을 ‘마한왕국의 국왕’이 아닌 ‘마한 사회의 수장층’이니, ‘마한시대 최상위층’이니 하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은, 결국 이 지역에 성립되어 있는 마한왕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가 마한사를 공부하려는 의미가 없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