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91) 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영암의 정체성

서울 숭실대 한국기독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용범(鎔范ㆍ사진 왼쪽). 동(銅)으로 된 도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틀을 ‘거푸집’ 형태로 만들었다. 1986년 3월 14일 국보 231호로 지정된 용범은 영암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용범은 영암이 마한 이전부터 외래 문물을 현지의 필요에 따라 새롭게 창조하는 문화의 중심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은 11월 12일 기찬랜드 트로트가요센터 공연장에 열린 ‘제2회 조선조 공론정치와 대동정신’ 학술 세미나. 
서울 숭실대 한국기독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용범(鎔范ㆍ사진 왼쪽). 동(銅)으로 된 도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틀을 ‘거푸집’ 형태로 만들었다. 1986년 3월 14일 국보 231호로 지정된 용범은 영암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용범은 영암이 마한 이전부터 외래 문물을 현지의 필요에 따라 새롭게 창조하는 문화의 중심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은 11월 12일 기찬랜드 트로트가요센터 공연장에 열린 ‘제2회 조선조 공론정치와 대동정신’ 학술 세미나. 

 

필자는 ‘마한의 심장, 영암’이라는 주제로 글을 쓸 때나 특강을 할 때 ‘개방성’과 ‘포용성’을 영암의 정체성으로 내세운다. 이렇게 보는 근거의 하나로 현재 서울 숭실대 한국기독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거푸집’을 먼저 설명한다. 거푸집은 동(銅)으로 된 도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틀로 용범(鎔范)이라고 예전의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거푸집은 해방 후 전라남도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1986년 3월 14일 국보 231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이 거푸집이 구매를 통해서 들어왔는데, 영암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졌다. 최근에는 다른 곳에서 출토되었다는 얘기도 있어 ‘전(傳) 영암’이라는 꼬리표도 있지만 ‘영암’ 출토라는 사실을 부인할 아무런 근거는 없다.

영암에서 왜 거푸집이 출토되었을까

필자는 이 거푸집이 영암에서 출토된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으나, 설사 이 출토지역이 어느 곳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암’ 출토설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본다. 거푸집은 수입에 의존하던 청동검 등 청동제품을 이제 현지에서 새롭게 독자적으로 제작하였음을 알려준다. 중국에서 수입한 청동검인 ‘비파형 동검’이 한반도에서 제작한 ‘세형동검’으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해준다. 거푸집은 곧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되 주체적으로 변용함을 알려준다. 거푸집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나왔다. 지금으로 말하면 완제품을 수입하던 제품을 국내 기술로 제작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영암지역이 마한 이전 시기에도 이미 외래 문물을 현지의 필요에 따라 새롭게 창조하는 문화의 중심지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거푸집이 영산강 입구의 영암에서 나왔다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문화의 수용성 상징, 장동고분

거푸집으로 상징하는 영산 지중해의 초입에 위치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영암의 지리적 위치는 마한시대에도 이어져 왔다. 대표적인 예가 시종의 장동고분의 토괴라고 생각한다. 즉, 장동고분은 원형과 방사형의 토괴가 함께 나타나고 있는데, 원래 원형은 일본에서 유행한 양식이고, 방사형은 가야에서 유행한 양식이었다. 이들 두 형식이 장동고분에서 융합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암이 왜래 문화를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장동식’ 모델의 토괴가 가야나 일본으로 역수출되고 있다. 장동 고분에 보이는 석실분 형식은 옹관 중심의 영산강 유역의 묘제에 처음 나타나는 묘제라는 점에서 이 지역의 높은 문화의 수용성을 엿보게 한다.

이렇듯 영산 지중해 입구 영암의 여러 모습은 초기 철기시대를 거쳐 마한시대에 들어와서도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확인시켜 준다. 이는 이후에도 이 지역인들의 열린 마음으로 작용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토착문화에 외래문화가 더해져 이루어진 융합문화였다. 이는 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영암의 정체성으로 나타났다. 

붕당의 한계를 극복한 유상운 부자

지난 11월 12일 월출산기찬랜드 트로트가요센터 공연장에서는 뜻깊은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대한민국 헌정회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사)마한역사문화연구회가 공동주최한 ‘제2회 조선조 공론정치와 대동정신’이라는 세미나가 그것이다. 이 세미나는 ‘진정한 탕평책과 국민화합’이라는 부제(副題)에서 알 수 있듯이 영조와 정조 때 탕평책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살핌으로써 지금의 한국정치 현실의 교훈을 얻자는 취지에서 열렸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제한된 참석가능 인원 99명을 가득 채울 정도로 뜨겁게 관심을 끈 이날 세미나는, 전직 국회의원 20여 명이 참석하여 행사의 의미를 더하였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영암출신으로 영의정까지 오른 약재 유상운과 그의 아들 만암 유봉휘를 집중 조명하였는데, 이들이 비록 붕당에 속하기는 하였으나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입장에서 특정 붕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른바 당벌(黨伐)과 거리를 두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특히 유상운의 시문 내용을 분석한 서울대 이종목 교수의 연구는 문학 작품에서 역사적 실체를 찾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필자는 이날 사회를 보면서도 얘기하였지만, 소설 ‘흥부전’은 조선 후기에 장자(長子)에 재산이 100% 상속되는 현실을 비판한 것으로, 이를 권선징악을 보여준 소설이라고 얘기하면 너무 단순한 해석이라 하였다. 

이날 발표에서 연구자들은 비록 붕당 간의 세력 갈등을 국왕이 이용하여 치열한 붕당 싸움이 전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권력 집단 내부에서 이루어진 공론(公論)을 바탕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피해가 전혀 없었다는 점, 아울러 이러한 공론정치가 발달한 영·정조 시기에 조선시대 ‘르네상스’라 부를 만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꽃을 피웠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곧 붕당정치로 인해 조선왕조가 멸망했다고 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세도정치기에 나타난 공론의 상실이 왕조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이날 세미나의 사회를 보면서 필자는 유상운 부자가 당시 붕당의 이익을 쫓아가지 않고 ‘화이부동’의 공론에 입각한 대동(大同) 정신을 실천한 것은 바로 외래문화를 거부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던 영암지역이 지닌 역사성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화이부동을 실천한 영암

이 지역이 지닌 문화의 개방성은 바로 상대에 대한 포용으로 이어진다. 유상운 부자의 사례에서 확인된 영암의 정체성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영암 구림지역에서 있었던 좌·우익의 갈등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을, 50여 년이 지난 2000년대 들어와 서로의 원한이 아닌 화해로 풀어가는 후손과 지역민의 모습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구림에 세워진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이 이를 웅변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 탑이 지닌 상징성이 영암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전남 제일 의병장을 자처한 함평출신 심남일이 이곳 영암 국사봉을 근거지로 ‘호남의소’라는 의병 사령부를 결성하였는데, 그 주축은 박평남이 이끄는 영암 의병이었다. 심남일이 비록 함평 출신이었지만, 그의 명성과 높은 애국심을 인정하여 박평남이 이끄는 영암 의병은 그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무려 3년 가까이 위대한 의병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는 영암인이 ‘영암’이라는 특정 지역에 매몰되어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영암 정체성의 가치를 살려야

최근 ‘광주전남 학생운동’과 관련된 판결문을 번역하는 일을 맡았던 필자는 1928년부터 1945년 해방 순간까지 학생운동을 한 인물들을 살필 기회를 얻었다. 영암 출신들이 지역적으로 가장 많은 곳의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최근 본보에서도 보도되었지만, 목포상업학교 학생운동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운동 역시 영암출신이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보 농민운동은 1930년대 항일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위대한 항쟁으로 거듭 평가되고 있다. 이는 개방성과 포용성에 바탕에 둔 영암의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외부의 압력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라 하겠다. 

영암지역 역사는 멀리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한의 심장, 영암’이 ‘역사의 도시, 영암’의 토대임을 기억해야 한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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