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뒤 10년 만에 일어난 독립운동사의 대사건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하여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 194개 학교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전체 학생의 절반이 넘는 5만4천 명이 희생된 엄청난 대 민족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숨은 주역 가운데 우리 고장 구림 출신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에 유학 중이던 최규창, 최규성, 최규문 그리고 광주사범학교의 최상호 학생이 있었다. 이 중 가장 먼저 광주고보에 입학했던 최규창은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3년 전인 1929년 11월 3일 광주시 불로동의 하숙집에서 광주고보생 9명과 광주농업학교생 6명 등 15명과 함께 학생독립운동의 불씨가 된 항일 비밀결사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성진회는 1년 뒤 각 학교 독서회로 확대 개편되어 최규성, 최규문, 최상호 등이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이들이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일찍이 구림에서 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최민섭 박규상 조병식 최기준 김재홍 정학순 정상조 조희도 박성집 박흔홍 박찬성 등 선각자들의 애국 열정에 힘입은 바 컸다. 다시 말해 광주에 유학한 젊은 학생들은 고향 선각자들의 영향을 받아 일찌감찌 독립운동 대열의 선두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며 민족의 장래에 대한 열망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강렬했던 것이다.

지난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92주년을 맞아 구림 출신 독립운동가 최규창(1908~1949년)이 1938년 쓴 편지가 83년 만에 공개돼 우리 고장 출신 젊은 학생들의 의로운 삶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성진회’가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평가받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과 해외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그 중심에 영암 구림 출신이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