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회’ 주도한 최규창, 친필 서한 공개
일제탄압·동맹휴교 생생한 기록 83년 만에
학생운동 92주년 맞아…의로운 삶 재조명

 

향토사학자 심정섭 씨가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92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최규창이 1938년 쓴 편지를 공개하며 항일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향토사학자 심정섭 씨가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92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최규창이 1938년 쓴 편지를 공개하며 항일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92주년을 맞아 구림출신 독립운동가 최규창(1908∼1949)이 1938년 쓴 편지가 공개돼 우리 고장 출신 젊은 학도들의 의로운 삶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향토사학자인 심정섭 씨(78·광주 북구 매곡동)가 한 언론매체를 통해 공개한 편지는 최규창이 1938년 1월 친척에게 보낸 것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현재 광주제일고)가 4개월 동안 동맹휴교로 학생들이 학업에 정진할 수 없고 교장마저 없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고 적었다. 또 “납부금이 낭비돼 학부모들은 울분을 호소할 길이 없다. 5학년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동맹휴업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데 애로가 많을 것 같다”며 우려했다.

최규창은 편지 끝부분에 “4학년 학생들도 장래가 걱정된다. 전남 나주에 통학하는 학생들도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 일본인들의 무성의한 교육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적었다. 심 씨는 “선생의 편지는 학생독립운동의 불씨가 9년이 지난 뒤에도 꺼지지 않고 일제에 치열하게 항거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최규창은 1908년 2월 9일 군서면 동구림리에서 태어났다. 1925년 광주고보에 입학한 최규창은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3년 전인 1929년 11월 3일 그가 하숙하고 있던 광주시 불로동에서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 15명과 함께 학생독립운동의 불씨가 된 항일비밀결사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창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성진회는 민족적 자각심을 깨우치고 앞서 나감으로써 빼앗긴 국권을 되찾자는 뜻으로 최규창이 직접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 열차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것이 발단이 됐다. 닷새 후인 11월 3일 일제는 명치일을 맞아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서 조직적으로 항의했고 이후 전국에서 학생 5만4천여 명이 참가하는 항일독립운동으로 확산됐다.

최규창은 광주시내 각급 학교와 광주고보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의 격문을 살포하다가 1928년 10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성진회의 주모자로 다시 체포되었고,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받고 항소한 결과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성진회는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평가받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과 해외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최규창 외에도 같은 구림 출신인으로 광주고보에 유학 중이던 최규성(1908년생), 최규문(1913년생) 그리고 광주사범학교 최상호(1902년생) 등이 함께 했다. 

최규창을 비롯한 구림출신 유학생들은 수차례에 걸친 동맹휴학과 식민지교육철폐 등 광주에서 학생운동과는 별도로 방학 중에는 고향에 내려와 신학문을 전파하고 야학을 통해 문맹을 깨우치는 데 앞장섰다. 일본 경찰들의 추적과 감시를 피해 가면서 ‘반제국주의’ 사상을 주민들에게 주입시키고 피압박민족의 서글픈 현실을 깨닫게 했다. 결국 최규문은 1929년 광주고보 독서회 사건으로 징역 2년6월, 최상호는 광주사범독서회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모두 학교로부터 퇴학 또는 정학처분을 받았으며 광주형무소 수감 중에도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재판 결과에 불복항소, 대구 복심법원으로 이송되어 가서도 항일투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목포까지 번져 1929년 11월 19일 목포 시가지를 휩쓸었다. 주역은 역시 구림출신으로 목포상업학교 5학년생인 최창호(1912년생)가 주동이 되었다. 최창호는 재판에 회부되어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들 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은 출옥 후에도 구림 영보 운암 모산 노송 등 영암군 일원에 걸쳐 비밀결사단체인 ‘영암농민운동협의회’를 조직하여 가난한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주도하고 독립사상과 민족정기를 일깨우면서 농민운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이른바 ‘영보 형제봉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최상호 2년 6월, 최규창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최규창은 세 번에 걸쳐 6년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최규창은 1982년 건국포장에 추서됐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리고 유해는 1989년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후손으로 최승호 전 광주일보 사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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