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동 현(·영암신문 영암읍 명예기자)


10월 13일, 가야금산조 축제공연을 실내체육관에서 한다는 방송을 듣고 일손을 멈춰 황급히 달려갔다. 공연 10분전이다. 막무가내로 앞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공연장은 인산인해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악성 김창조의 생애를 추모하였다. 김창조는 영암읍 회문리 회의촌 당거리의 외딴 집에서 1856년 7월 세습적인 율객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신분이 낮았던 재인(廣大) 신세의 천시를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보단 마을 앞산을 찾아가 가야금 연주에 몰두하였다. 오죽했으면 마을 사람들이 그 바위를 개금바위라고 하였을까?

그런데 조선시대부터 일제를 거쳐 6·25사변 전 무렵까지 이 용추골짜기에는 황혼이 지면 나뭇짐을 진 머슴들이 줄지어 산길을 내려오면서 부르는 판소리의 창이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것이 일상사였다. 황혼이 깃든 골짜기에는 김창조의 가야금 소리와 머슴들의 판소리의 창이 저절로 어우러져 메아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빈곤과 멸시 속에서 살아야 했던 김창조와 머슴들. 어쩜 이들의 가슴에 맺힌 한은 같지 않았을까? 김창조의 음악적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추리하여 정리할 수는 없으나‘김창조의 가야금’과‘머슴들의 창’의 만남은 확실히 있었다.

이윽고 고대했던 인간문화재 양승희의 죽파류 가야금 산조연주가 시작되었다. 느리게 시작되는 둔탁한 가야금 소리, 개금바위에서 지치면 누워 쳐다보았을 저 창공에 유유히 흐르는 흰구름 떼들. “인생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흘러가는 흰구름 송이처럼 느린 진양조의 가락은 점점 빨라지면서 청명해졌다. 좁은 산길을 나뭇짐 지고 내려오면서 하루생활이 그토록 서럽고 머슴살이의 한이 그토록 가슴 속 깊이 맺혀 풀리지 못해 설움과 분통이 피범벅이 되어 흐느끼듯 토해내던 절규의 소리.

개금소리와 창 소리는 단순한‘소리’가 아니다. 사람의 간장을 짜낸 기름이요, 피눈물인 것이다. 중모리·중중모리에 갈수록 빠르기와 청명함과 애절함이 더해갔다. 이윽고 자진머리 부분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아아! 이 황홀감. 김창조의 산조에는 머슴들과 자신의 애환이 서려 있다. 인간의 四端七情을 그 천부적인 뛰어난 음악적 감흥으로 승화시켜 조(調)의 다양한 변화로 표현한 것이 불후의 명작 가야금산조가 아닌가.

궁중음악인 아악에 비해 산조는 겨레의 아픈 삶의 애환을 승화시킨 민중음악이라는 점에서 더욱 친숙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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