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중 /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 전남에너지고 교사
김기중 / 전남교육연구소 이사장 / 전남에너지고 교사

코로나19 기세가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확진자 수가 지난 8월 말에 이어 다시 확산세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빠른 속도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변이 바이러스들의 발호를 목도하자니 그저 할 말을 잃을 뿐이다. 지난해 12월 18일 영국에서 보고된 알파 변이를 시작으로 베타(남아공), 감마(브라질), 델타(인도), 엡실론(미국), 제타(브라질), 람다(페루), 뮤(콜롬비아) 변이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이 9개월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WHO(세계보건기구)는 그리스 알파벳 순으로 이름 짓기에도 바쁠 지경이다. 그러니 개별 변종들에 일일이 대응한다는 일이 어쩌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들의 창궐 원인을 곰곰이 따져보고, 이들을 달래가며 스스로 설치지 못하도록 내재적인 건강성을 회복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개인적, 사회적, 전 지구적 삶의 대전환이라는 철학적, 인문학적 성찰과 실천이 절실한 시점이다.

바이러스는 세균(박테리아)과 달리 스스로 존재하며 번식할 수 없다. 그러니 숙주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즉 자신을 다른 생명체(숙주)의 세포에 부착시켜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박테리아가 무해한 반면, 바이러스는 거의 모든 경우에 질병을 유발한다. 숙주에 붙어 질병을 유발하는 존재, 이것이 바로 바이러스의 정체인 것이다. 우리가 ‘컴퓨터 박테리아’라고 하지 않고 ‘컴퓨터 바이러스’라고 명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놈들은 프로그램으로만 존재하면서 사용자 몰래 자기 자신이나 자신과 유사한 변형을 마구잡이로 복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건, 우리의 우군인 박테리아와는 달리 스파이크(spike) 단백질로 단단히 무장한 채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를 일망타진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니 이들과 어떻게 공존을 모색할 것인가?

6개월이 다 지난 소식이지만, 지난 3월 인도의 유명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아미르 칸’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보도를 접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인데, 바로 이 바이러스는 10년 전 그가 주연했던 영화 ‘세 얼간이’ 스토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바이러스’는 바로 영화 속 주인공 ‘란초’가 다녔던, 소위 명문 공과대학인 ICE 총장 ‘비루’의 닉네임이다. 영화 속 ‘바이러스’는 자나 깨나 학생들에게 경쟁의식을 고취시키기에 여념이 없으며, 그것을 통하여 소위 명문대학 총장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러니 그의 훈화는 늘 녹음기처럼 반복된다. “뻐꾸기는 자신이 둥지를 만들지 않고 남의 둥지에 가 알을 낳는다. 그리고 부화한 뻐꾸기는 원래 둥지의 알을 밀어내 떨어뜨린다. 경쟁 끝”으로 마무리되는 그의 워딩(wording)은 다른 숙주 세포에 기생하며 해를 끼치는 바이러스를 연상시키에 충분하다. 

‘바이러스’가, 세 주인공 ‘란초’, ‘파르한’, ‘라주’가 ‘비루’ 총장에게 붙여준 이름이라면, ‘세 얼간이’는 ‘바이러스’가 이들을 일컫는 대명사이다. ‘바이러스’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질문이나 행동을 일삼으며, 심지어는 고향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도 외면하는 얼빠진 녀석들인 셈이다. 어쨌건, ‘바이러스’와 ‘세 얼간이’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도 영화는 ‘All Is Well’, ‘Zoobi Doobi Bambaram’ 등의 경쾌한 음악과 함께 우리에게 보편적인 공감과 감동을 선사한다. ‘세 얼간이’를 통해 자신만의 꿈과 현실 간의 괴리를, ‘바이러스’를 통해 경쟁교육 현실에서 과감하게 이탈하지 못하는 우리 안의 두 가지 모습들을 동시에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시원하게 ‘바이러스’를 골탕 먹이다가도 퇴학을 면하기 위해 그에게 매달리는 얼간이들의 모습이 어쩌면 바이러스와의 대립과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현 코로나 시국의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할 것이다.

코로나 지속의 시대, 개인적, 사회적, 전 지구적 대전환의 모색과 이행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교육, 문화, 생태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최소한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가속화되어 온 분업화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 인간 세상은 얼마나 많이 파편화되어 왔는가? 그리하여 지금 얼마나 무기력하게 스파이크 단백질을 무기로 장착한 이 작은 미생물의 표적이 되고 있는가? 우리 인류는 과연 이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며 공동의 집인 지구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가? 대립과 갈등, 분열의 시대를 과감히 청산하고 평화와 정의, 통합으로의 대전환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제는, 그 어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블랙홀처럼 끝없는 확대 재생산을 추구하며 사회 양극화와 기후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 초국적 자본과 제국주의적 경쟁시스템을 끝내야만 한다. 교육개혁은 대학 무상화와 통합 네트워크 입시전형으로부터, 사회적 신뢰 구축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 학벌 구조와 소위 흙수저를 인정하지 못하는 특권의식 타파로부터, 2050 탄소 중립 실현은 ‘그린 뉴딜’로 포장된 신상품이 아니라, ‘노동 존중’과 ‘기후 정의’라는 두 축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죽어가는 지구 위에 더 이상 일자리는 없고, 일자리 없이는 또한 생태적 대전환도 없다’는 경구를 깊이 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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