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홍 근 / 영암읍 교동리 출생 / 전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  전 서울 월정초등학교 교장 / 한국초등학교 골프연맹 이사   및 심판위원
최 홍 근 / 영암읍 교동리 출생 / 전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  전 서울 월정초등학교 교장 / 한국초등학교 골프연맹 이사   및 심판위원

코로나 2년차를 맞는 올해는 유난히도 비가 잦습니다. 새벽에 후두둑하는 소리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창유리에 방울방울 맺혀있는 빗물을 보고 있노라면, 어둠컴컴하고 어려웠던 유년시절이 슬며시 머릿속을 채워오면서 짠한 기억들이 조곤조곤 떠옵니다.

어느 해이던가, 오랜 장마 때문에 다 익은 보리들이 밭에 세워진 채 썩어가는 일이 있었더랬습니다. 덜 썩은 이삭이라도 얻어내려고 후줄근하게 비를 맞으며 보리 대궁이만 베어다 말려 보리죽으로 연명하던 때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를 보면 허허로워집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헛헛해 집니다. 문득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만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이제 청춘일러니 오는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리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한들 쓸데 있나’ ‘사철가초입이 떠오릅니다.

며칠 전 자유로cc에서 라운드가 있었는데, 비 예보입니다. 그 다음날도 군산cc에서 MBN 꿈나무 골프대회 경기위원으로 가야하는데 비 예보입니다. 심란해집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우리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는 없고, 순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자유로cc에서는 골프를 마치고 샤워장에 들어가는데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골프 10락 중 하나가 생각납니다. 우리 라운드 끝나고 비가 오면 아직 골프하고 있는 사람들이 난감해지는데, 남 못되면 좋아하는 그런 못된 쾌감을 맛봅니다. 이 날은 우리 아파트 여름 대회였습니다. 종반까지 선두로 달리다 마지막 두 홀에서 5타를 잃어 메달리스트는 못했지만, 후반 14번 홀 파3홀이 니어를 뽑는 홀인데 130m. 7번 아이언, 손에 와 닿는 느낌이 찰지더니 깃대 옆에 붙었습니다. 1.3m 탭인 버디. 니어상으로 신세계 10만원 상품권을 받았습니다.

69일 오전 430분 기상. 검단 경부회장 집으로 갑니다. 그곳에 내 차를 세워두고 경부회장 차에 짐을 싣고 수지 회장님댁으로 갑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아침을 준비했으니 먹고 가라는 연락이 옵니다. 언제 들러도 회장님댁 정원은 잘 손질된 잔디와 화사한 야생화들이 맞아줍니다. 바위취꽃, 노루오줌꽃, 인동·붉은 인동꽃, 섬초롱꽃이 자태를 뽑내며 화사합니다. 예전 MBC 드라마에 촬영장으로 소개된 집답게 아기자기 예쁩니다. 사모님 음식 솜씨 또한 일품입니다. 부드러운 열무김치는 간이 잘돼 아삭거리고, 무말랭이는 단짠단짠 아작거리며, 부추김치, 멸치 무침도 혓바닥에 착 감깁니다. 잡곡밥과 보리새우가 들어간 아욱국은 밑반찬과 환상의 조화를 이룹니다. 더욱 후식으로 아보카드유로 부친 계란 후라이와 직접 내린 원두커피는 금상첨화입니다.

710. 판교를 출발한 버스는 군산으로 향합니다. 오랫만에 만난 경기위원들과의 환담은 그동안의 우울을 날려줍니다. 이 나이에 젊은 청춘들과 같이 놀고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운이라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차창 밖은 말 그대로 녹색의 바다입니다. 굼실굼실 일렁이는 보리 이삭의 물결이 넘실댑니다. 말 그대로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입니다.

1시경 클럽 하우스에 본부를 차리고 회의를 합니다. 난 아웃코스 4·5번 홀을 맡습니다. 작년까지 1번이나 10번 홀 출발을 맡아서 두세 시간 꼼짝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주의 사항을 말하고 나면 입에서 단내가 났었는데, 이젠 그 일에서 졸업입니다. 연맹 로고가 새겨진 새 바람막이와 모자를 지급받습니다. 오후 130. 경기위원들과 함께 정읍코스 티샷입니다. 동반자로 KPGA 프로골퍼였던 경기위원장과 함께입니다. 바람은 없고 습기를 가득 품은 대기는 33도입니다. 땀을 빼질빼질 흘리며 샷을 하는데 금방 지칩니다. 그래도 1004m 7에서 오랜만에 파를 했습니다. ·후반 통 털어 버디 2개도 값진 수확이었구요. 저녁 식사는 군산 시내 ‘00네 연탄구이집에서 통삽겹을 굽습니다, 이곳 군산에 오면 으레 한 번은 들리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많습니다. 골프텔로 돌아와도 잠을 못잡니다. 지난 대회에서 중대한 조작행위를 한 선수의 징계 양정에 대한 회의를 11시경까지 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440분 알람소리에 눈을 뜹니다. 부랴부랴 본부에 돌아와 무전기와 초시계 등을 챙깁니다. 군산cc는 목~일까지 조식은 뷔페랍니다. 먹을 게 너무 많아 그동안 간헐적 단식을 하던 리듬을 깨버립니다. 콜레스톨이 많은 새우튀김을 많이도 먹었습니다. 6시 정각. 첫 티업으로 대회가 시작합니다. 하늘에는 높은 구름이 걸려 있고, 비가 오려는지 하늬바람이 불어 선선합니다. 카트 도롯가 잡풀 속에서 고개를 내민 씀바귀꽃이 노랗게 귀엽습니다. 참가학생 270여명. 오늘은 1·2부로 나뉘어 경기를 해야 합니다. 어린 학생들이지만 한 샷 한 샷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예쁩니다. 강호동씨의 아들도 대회에 왔는데, 드라이버가 장난이 아닙니다. 앞으로 기대되는 선수의 등장입니다. 오후 450분경. 2부 대회가 끝나고 따끈한 샤워 물줄기에 피곤한 몸을 맡깁니다.

시상식을 마치고, 늦은 저녁으로 ‘000이라는 군산cc 옆 한식당으로 갑니다. 이곳도 가끔 들리는 곳인데, 특히 청국장과 고구마순나물, 고사리나물, 묵은 김장 김치가 일품입니다.

올라오는 길, 어김없이 빗방울이 날립니다. 차창에 부딪는 소리가 큽니다. 다시 사철가마지막 부분이 떠오릅니다. ‘무정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 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어화 벗님네들 이 내 한 말 들어보소. 인생 모두가 백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난 지금 사십이 아니라 칠십을 넘겨 살고 있으니 밖에 내리는 비는 내 마음에 단비가 됩니다. 피곤한 몸이지만 휴대폰을 뒤적여 영화 미나리’ OST ‘비의 노래를 찾아 듣습니다. 요란스럽지 않고, 방정맞지 않아서 편합니다. 바람소리처럼 조용해 오히려 귀를 기울여 듣게 됩니다. 꿈속으로 빠져듭니다. 새벽 1시경 집에 도착합니다. 무심한 빗소리 속에서 내 인생의 어느 날이 꿈결처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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