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홍 근 / 영암읍 교동리 출생 / 전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  전 서울 월정초등학교 교장 / 한국초등학교 골프연맹 이사   및 심판위원
최 홍 근 / 영암읍 교동리 출생 / 전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  전 서울 월정초등학교 교장 / 한국초등학교 골프연맹 이사   및 심판위원

세월이 참 빠릅니다. 10대는 시속 10㎞로 가고, 70대는 70㎞로 세월이 간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퇴임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언 9년여를 넘기고 10년을 채워갑니다. 정말 시간이 휘리릭 휘리릭 지나갑니다. 백수(白手)란 할 일 없이 놀고먹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 줄은 누구나 압니다. 9년여를 놀고먹었으니 백수인 건 확실합니다. 누군가 우리 백수들을 ‘거안실업회장’이라고도 한다는데, 거실과 안방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랍니다. 어쩌면 힘들고 팍팍한 노후가 될 뻔 했는데, 그래도 소원(所願)하던 강변(江邊)에 살면서 놀고먹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거실 동쪽 창문으로 명색이 한강 조망권이라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보입니다. 멀리 일산도 손에 잡힐 듯 보입니다. 아파트를 벗어나 5분이면 한강습지 생태공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습니다.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길, 호수 위로 얹혀놓은 목조 데크, 참나무 오솔길, 은행나무 황토길, 단풍나무숲 길을 걸으면 한 시간 반이 휙 지나갑니다. 억새와 갈대가 사시사철 바람에 서걱거립니다. 초겨울이면 수많은 청둥오리와 재두루미들의 날개 짓을 볼 수 있습니다. 20만 평이 내 정원이나 진배없습니다. 나이 들면 자꾸자꾸 걸어야 한다는데 딱입니다.

2008년인가 봅니다. 중국 베이징에서 살고 있던 손녀들이 겨울방학 때 와서 강화도를 구경시켜주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김포 어름을 지나는데 모델하우스가 보였습니다. 우연히 들른 모델하우스는 한강 바로 곁에 짓고 있는 아파트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한강이 흐르고, 금상첨화로 습지 생태공원을 만든다는 홍보물을 발견하고, ‘이거다’하고 곧바로 계약한 것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입니다. 강촌에서 고기 잡는 어부는 아닐지라도 담담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여유 있게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 강변에서의 사계(四季)가 꿈 같이 흘러갑니다.

봄(春). 주차장을 지하로 넣어버린 우리 아파트의 봄은 휘황한 꽃 대궐이 됩니다. 유달리 정원 조경을 잘하는 브랜드를 가진 아파트라서 동간 사이사이에 심어진 수목들이 장난이 아닙니다. 홍송(紅松) 소나무 숲, 자작나무숲, 떡갈나무숲, 회화나무숲, 수양벚나무와 벚나무들이 화사함을 뽐내는 벚나무길, 인공으로 만든 실개천 바위틈에 식생된 수생식물은 그 가지 수가 엄청납니다. 

여름(夏).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에 해는 어이 더디 가는고. 그달 그믐 다 보내고 오월이라 단오일은 천중지가절(天中之佳節)이요.’ 녹음방초라는 단가(短歌)입니다. 여름이면 경주로 향합니다. 위에 소개한 단가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경주로 향합니다. 녹음이 짙은 계절 경주에서는 서라벌배 초등학생 골프대회가 열립니다. 버스 한 대에 몸을 실은 경기위원들 20여 명이 경주로 갑니다. 2박 3일. 경주대회에 갈 때면 수학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들뜹니다. 꿈만 같습니다. 지난 세월을 보상받는 듯한 기분에 빠집니다. 경주(慶州)는 제 학창시절 아픔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경주는 수학 여행지였습니다. 가난해서, 돈 때문에 수학여행을 못 갔습니다. 이젠 매년 당당하게 경주에 갑니다. 경주 보문cc에 도착해 코스 세팅을 끝내면 오후 라운드를 합니다. 답사 라운드입니다. 저녁은 주최 측의 푸짐한 만찬과 포근한 코모도호텔 잠자리가 제공됩니다. 첫날 대회가 끝나면 오후 마지막 조로 라운드를 한 번 더 합니다. 전 1번 홀 출발을 맡습니다. 녹음(綠陰)이 출렁거리고, 햇살은 발갛고, 안압지 야경은 무서울 정도로 선명합니다. 둘째, 셋째 날이 꿈결처럼 지나갑니다. 

앞으로 군산cc에서 펼쳐질 MBN 대회, 우리 영암 아크로cc에서 치러질 녹색 드림배, 유성cc에서 치러질 박세리배, 보성cc에서 치러질 회장배, 안동에서 치러질 문광부 장관배, 군산 덕신하우징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을(秋).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살았음직한 산속 호텔에서 길을 떠납니다. 인터라켄, 넓직한 공원 잔디 위에는 자유롭게 비상하다 착륙하는 페러그라이더들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잔디와 나무들은 푸르고 노란데 저 멀리 산 정상은 희끗한 눈들로 비현실적입니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융프라우호 기차에 오릅니다. 세모로 각진 고동색 지붕을 이고 가을 속에 빠져 있는 집들을 보면 하이디와 클라라, 아름 할아버지가 불쑥 나타날 것 같습니다. 터널을 지나면 융프라우 정상입니다. 얼음 궁전으로 들어갑니다. 아, 거기서 파는 신라면, 컵라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국력을 실감합니다. 정말 감동입니다. 휘휘 저어 한 젓가락 먹으면 ‘아,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가슴이 싸아 해지면서 행복감에 빠져듭니다.

겨울(冬). 매년 1월이면 말레이시아로 갑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북쪽으로 다섯 시간. 말라카 해협을 바로 곁으로 낀 다마이라우트 골프장입니다. 우리 초등학교 골프연맹 겨울 전지훈련 장소입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스위스 가든 호텔에 여장을 풀면 10박 11일의 라운드가 시작합니다. 팡코르 섬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기며 샷을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한창때는 36홀을 쳤는데, 이젠 27홀이 적당합니다. 햇살은 뜨겁고, 덥긴하지만 한 샷 한 샷 정성을 담습니다. 카트에까지 뛰어올라 가방을 뒤지는 원숭이들을 쫓으며 라운드를 합니다. 5년 전이려나. 약한 집사람을 이곳에서 36홀 뺑뺑이를 돌렸더니 왼쪽 회전근개가 너덜너덜해져 2년 전부터는 골프를 접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래도 요즘 내가 라운드를 떠나면 꼼꼼하게 챙겨주는 집사람이 고맙습니다. 말레이시아행, 금년은 코로나 때문에 엄두도 못냈습니다.

사라락사라락. 설핏 낮잠 속에서 집 앞 참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스치우는 소릴 듣습니다. 파란 캔버스 위로 하얀색을 묻힌 붓질처럼 하늘은 한 줄기 구름발이 예쁩니다. 행복해 집니다. 정말 행복은 인생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 상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줄기 바람에게서도, 한 떨기 야생화에게서도, 꽁지깃 까불거리는 까치의 몸짓에서도, ‘구구구구’ 산비둘기의 울음 속에서도, 행복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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