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 (4)   ■영암읍 회문리 ④

허술한 회의촌 고인돌 유적  /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영암에는 약 800여 기의 고인돌이 있다. 서호면에 가장 많고, 금정면이 두 번째다. 영암읍은 회문리 1구인 녹암마을과 2구인 회의촌에 고인돌이 집중돼 있다. 회의촌 고인들은 영암축협 하나로마트 입구에 보존돼 있지만 안내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허술한 회의촌 고인돌 유적  /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영암에는 약 800여 기의 고인돌이 있다. 서호면에 가장 많고, 금정면이 두 번째다. 영암읍은 회문리 1구인 녹암마을과 2구인 회의촌에 고인돌이 집중돼 있다. 회의촌 고인들은 영암축협 하나로마트 입구에 보존돼 있지만 안내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회의촌 고인돌(나군)

영암읍 회문리 207번지 일원에 있었던 고인돌은 영암축협 종합청사 신축공사 부지에 포함되어 (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에서 2014년 11월 24~12월 30일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실시한 후 이곳으로 이전·복원하였다. 

발굴된 유적은 덮개돌 2기와 무덤방(석실) 25기 등 총 17기가 발견되었으며, 유물은 자루 달린 간돌검(유병식 석검), 슴베식 돌화살촉(유경식 석촉), 민무늬토기편 등이 발견되었다. 복원된 고인돌은 모두 받침돌이 있는 바둑판식(기반식) 고인돌이다. 1호의 덮개돌 규모는 길이 245㎝, 너비 198㎝, 두께 78㎝로 무게는 5톤이다. 2호의 덮개돌 규모는 길이 187㎝, 너비 74㎝, 두께 73㎝로 무게는 4톤이다. 여기 고인돌은 주민들이 ‘독바우’ ‘바우배기’라 불렀다고 하며, 교육 및 홍보용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이전·복원한 것이다.

과거 30년 전만 해도 회문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군부대 입구 큰 길가에 놓여있던 커다란 돌덩어리들이었다. 간이 버스정류소 바로 곁에 무더기로 모여 있었다. 필자와 같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치곤 했었다. “먼 큰 독덩어리가 길가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냐?”하는 정도였다. 이제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서 예전과는 달리 고향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니 저 돌맹이들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세계 최대의 고인돌 유적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고인돌이 당시 지배계층 사람들의 무덤이었다고 배웠는데 좀 더 상세하게 알기 위해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 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며, 고대국가 발생 직전의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다.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호칭이 다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고인돌은 북유럽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유럽의 영국에서부터 프랑스·스위스와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지중해의 북쪽 연안지방, 중동·인도·동남아시아 등지와 중국의 복건성(福建省)·절강성(浙江省)·산동(山東)반도·요동(遼東)반도·길림성(吉林省)남부, 한반도 전역, 그리고 일본의 규슈(九州)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의 분포지가 거의 범세계적인 것임과 아울러서 그 기능에 관해서도 많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앞에서 말한 무덤 기능, 둘째는 제단(祭壇)의 기능, 셋째는 묘표석(墓標石)의 기능 등인데, 묘표석의 기능은 제단의 기능에 포함될 것으로 생각된다. 

고인돌의 축조는 석재가 거대하고 무게가 많이 나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조직체가 아니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결집된 세력집단을 전제로 하고, 그것은 고대국가 성립 이전의 소국(小國: 현재의 郡 정도의 면적) 상태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남해안 지방 고인돌에서 다수의 비파형청동단검(琵琶形靑銅短劍)이 출토되는 단계는 이미 고대국가 성립 이후라고 추측된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왜 전라도에 고인돌이 집중돼 있을까?

고인돌(지석묘)은 전 세계에 약 8만기가 있는데 그중에서 우리나라(남북한)에 그 절반인 4만기가 있고, 또 그중 절반인 약 2만기가 전라도에 분포해 있다고 한다. 지석묘는 서남해안,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에 밀집되어 있다. 목포대학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 영암에는 약 800여 기의 고인돌이 있다. 서호면에 가장 많고, 금정면이 두 번째이다. 영암읍은 회문리 1구인 녹암마을과 2구인 회의촌에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다. 회의촌 고인들은 사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영암축협 하나로마트 입구에 보존되어 있다.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비바람에 퇴색되어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안내판에 ‘교육 및 홍보용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이전·복원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지만 관리 상태가 엉망이어서 그 취지를 무색하게 만든다. 

이끼가 끼고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거대한 지석묘의 덮개돌을 보면서 한참 생각에 잠겼다. 수천 년 전 사람들은 사람의 무덤을 만드는 데 왜 저렇게 큰 힘을 들였을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권력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무덤일까? 규모의 크고 작음은 권력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일까? 고인돌이 제단의 기능도 담당했다면 저 거대한 덮개돌은 하늘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을까?

무엇보다도 ‘도대체 왜 우리 전라도에 그토록 많은 고인돌이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아무리 작은 고인돌이라 할지라도 한 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70~80명의 인원이 필요하고, 50톤이 넘는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1천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인돌이 많이 밀집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임을 뜻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집단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 지역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임을 뜻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전라도

세계 절반의 고인돌이 남북한에 몰려 있고, 그중에서 절반이 전라도에 밀집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위에서 말한 내용대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이고, 특히 그 중에서 전라도야말로 최고로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것을 뜻한다. 위도상 온대 지방에 속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수가 수려하다.

특히 전라도는 서남해안에 접하여 광활한 개펄을 가지고 있으며, 강과 들과 산이 조화를 이루어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산에서 나오는 임산물과 강과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해서 분류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기름진 퇴적토와 시뻘겋다 못해 검푸른 황토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또한 그 종류와 품질이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뛰어나다. 사람들이 모여 살 수밖에 없는 최적의 생활환경이다.

필자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이 전라도에서부터 퍼져나간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고인돌은 영어로 돌멘(Dolmen)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돌을 일컬어 말하는 ‘돌멩이’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것도 신기한 일이지 않은가? ‘돌멩이’가 건너가 ‘돌멘’이 된 것이 아닐까?

돌을 사랑한 민족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돌을 신성시 해왔다. 비바람을 잘 견디고 단단한 돌에 영원성과 신성을 부여해왔다. 마을 입구에는 선돌이나 기자석(祈子石), 석장승을 세웠고, 선황당 고개에는 돌탑을 쌓았다. 사찰에는 어김없이 석탑을 세웠고 바위에는 미륵불을 새겼다. 집을 지을 때도 주춧돌을 사용했고 무덤을 쓸 때도 돌을 이용했다. 단명한 사주를 타고난 자식을 위해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바위에 이름을 새겨넣는 풍습도 성행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보듯이 후세인들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석비(石碑)를 세웠다. 선비들은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살기 위해 마당 한쪽에 큰 돌을 가져다 놓기도 했다. 괴석(怪石)은 문인화 그림에도 자주 등장한다. 돌을 유난히 소중히 여기는 관습은 아마도 석기시대의 유물일는지 모른다.

구석기와 신석기의 구분

구석기와 신석기를 거치면서 돌은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구석기와 신석기를 구분해주는 것은 돌을 사용하여 도구를 만드는 방식이다. 구석기 사람들은 돌을 떼어 내 도구를 만들었다. 이를 ‘뗀석기’(타제석기)라고 부른다. 신석기 사람들은 떼어 낸 돌을 숫돌에 갈아 돌칼, 돌화살촉, 그물추와 같은 정교한 도구를 만들었다. 이처럼 숫돌에 갈아 만드는 석기를 ‘간석기’(마제석기)라고 한다. ‘뗀석기’를 이용한 시기를 구석기, ‘간석기’를 이용한 시기를 신석기로 구분한다.

신석기 사람들은 돌을 활용하는 기술이 늘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나무 말뚝을 박아넣은 다음 물을 부어 나무의 부피가 늘어나는 것을 활용하여 돌을 떼어 냈다. 이 기술이 점차 발달하여 고인돌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마제석기의 발달과 더불어 흙을 구워 토기를 만드는 기술을 터득한 신석기인들은 더 나아가 광물을 활용하는 방법을 발견하면서 마침내 청동기시대를 열었다. 고인돌 문화는 청동기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공동체를 이루어 집단생활을 하는 곳마다 선돌이 세워지고 고인돌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거석문화가 일반화된 우리나라는 ‘고인돌 왕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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