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69)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보물지정 유감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 문화재청은 4월 21일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을 보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 문화재청은 4월 21일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을 보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

4월 21일 문화재청은 전북 고창 봉덕리 1호분과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 '금동신발' 2건을 비롯해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및 복장유물’ 등 총 3건을 보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1500여 년 전 한국 고대인들의 상장례(喪葬禮) 문화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5~6세기 백제 금속공예 기술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하였다. 문화재청은 둘 다 각각 한 쌍으로 출토된 금동신발은 모두 5세기 백제 시기에 제작됐으며, 삼국시대 고분출토 금동신발 중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보기 드문 사례라고 발표하였다. 그동안 삼국시대 고분출토 유물 중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은 국보나 보물로 상당수 지정됐지만, ‘금동신발’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보도자료는 덧붙이고 있다.

보물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고창 봉덕리에 자리한 4기의 대형 분구묘 중 규모가 가장 큰 1호분의 제4호 석실에서 2009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발굴했다. 4호 석실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무덤으로, 여기에서 금동신발 한 쌍이 무덤 주인공의 양쪽 발에 신겨져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출토된 것이다. 이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장례 때 의례용으로 사용된 신발로 백제 시대의 전형적인 형태와 문양을 보여주는 금속공예품이라 하였다. 금동신발의 전체 형태를 보면, 발목 깃을 갖추어 앞쪽은 뾰족하면서 약간 위로 들렸고, 중간 바닥이 편평하며, 뒤쪽은 약간 좁아져 둥근 편이어서 흡사 배 모양을 연상케 한다. 투각(透刻)의 육각형으로 구획된 형태 안에 용, 인면조신(사람 얼굴에 새 몸통을 가진 상상의 동물), 쌍조문(雙鳥文), 괴수, 연꽃 등 각종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됐다. 신발 바닥에는 1.7㎝ 높이의 뾰족한 못 18개를 규칙적으로 붙였고, 내부에는 비단 재질의 직물을 발라 마감했다. 

고창 봉덕리 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현재까지 출토된 약 19점의 금동신발 중 가장 완벽한 형태라고 하는데,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비교했을 때 어자무늬(魚子文, 물고기 알 문양) 등 삼국시대 초기 문양이 확인되어 시기적으로 앞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의 신발과 마찬가지로 바닥판과 좌우측판, 발목깃판으로 구성되고 바닥에 징(스파이크)을 박은 백제 금동신발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어 백제의 중앙 권력자가 제작해 왕의 힘을 과시하고 지방 수장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지방 유력 지배층에게 내려준 ‘위세품(威勢品)’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보물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백제시대 의례용 금동신발로, 보기 드물게 원형을 갖추어 출토된 중요한 고대 금속공예품이자, 다양하고 뛰어난 공예기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5세기 중반 백제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보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삼국시대 대형 분구묘인 정촌고분의 1호 석실에서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것이다. 5~6세기 무렵 영산강 유역에는 복암리 고분군, 정촌고분, 영동리 고분군 등 대형 고분이 축조되었는데, 그 중 정촌고분은 1,500여 년 전 백제, 마한 문화를 가장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고분이면서 도굴 피해가 없어 매장의 원형을 알 수 있어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무덤이다. 

정촌고분 1호 석실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은 좌우 신발 한 쌍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완벽한 모습으로 출토됐으며 발등 부분에 부착된 용머리 장식은 현존 삼국시대 금동신발 중 유일한 사례로 주목을 받아 왔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의 최근 과학적 분석 결과에 따르면 신발의 주인은 40대 여성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 금동신발은 형태와 제작기법, 문양 등에서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과 매우 유사하다. 얇은 금동판 4장으로 바닥판과 좌우 옆면판, 발목깃판을 만들어 서로 작은 못으로 연결하였고 문양을 투각해 세부를 선으로 묘사한 방식 등 고대 금속공예 기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육각문, 용문, 인면조신(人面鳥身), 괴수문, 연화문 등 사후영생(死後永生)을 기원한 고대인들의 사후세계관이 반영된 듯한 다양한 문양이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어 조형적으로도 매우 우수하다. 

문화재청의 보도자료를 보면, 보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고창 봉덕리 금동신발에 비해 조금 늦은 5세기 후반경에 제작되어 6세기 무령왕릉 출토 금동신발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단계를 보여주는 공예품으로, 5~6세기 백제의 사상과 미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곧 보물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2종은 국내 최초 원형 그대로 발굴된 유물이라는 점에서 고고학과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같은 시기 중국이나 고구려, 신라의 미술품과 비교하여 문양의 기원과 변천, 상징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시대 금동신발과 비교하여 백제 공예문화의 독자성을 밝힐 수 있는 원천유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고 하였다. 

아파트형 고분으로 복암리 고분에 이웃한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산 91번지 일대의 산사면에 위치한 정촌고분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결과 고분의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한 변 길이 24~26m, 높이 9m의 규모로 확인되었다. 고분 끝자락에는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방형의 석축이 조성되어 있다. 매장시설로 석실 3기, 석곽 3기, 옹관 3기로 총 9기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1호 석실에서 확인된 금동신발은 그 형태와 세부 문양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금동신발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미 필자도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의 역사적 가치를 본란을 통해 여러 차례 살핀 바 있지만,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도 2019년 ‘고대 동아시아의 금동관과 금동신발’이라는 주제의 국제 학술세미나를 열어 그 가치를 새롭게 조명한 바 있다. 발등에 부착된 ‘용머리 장식’은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이 다른 출토 금동신발과 비교되지 않은 파격적인 양식이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감히 ‘마한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높은 문화 수준을 자랑하는 대표적 유물이라 하겠다. 따라서 금동신발의 ‘보물’ 지정은 당연한 결과로 여긴다.

백제의 금동신발?

그런데 이번 보물지정과 관련하여 필자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을 ‘백제의 금동신발’로 판단하였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의 제작 시기를 탄소측정 연대 등 과학적 기법 등을 동원하여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하였다. 당연히 마한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백제의 것으로 살폈다는 것은 5세기 영산강 유역을 마한의 영역이 아닌 ‘백제의 영역’으로 인식한 기존 주장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아직도 적지 않은 학자들은 5세기의 영산강 유역을 백제의 간접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동신발도 백제왕이 이 지역의 재지 세력에게 하사한 위세품으로 살피고 있다. 

이번 문화재청의 보도자료를 보면 정촌고분 금동신발을 통해 백제의 사상·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백제·마한’이라는 표현도 하여 ‘마한’을 끼워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역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강고한 마한 붐을 의식한 행위가 아닌가 짐작된다.

결론적으로 이번 정촌고분 금동신발의 보물지정은 찬란한 마한 문명의 가치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지역의 마한역사는 4세 말 백제의 영역에 편입되었다는 통설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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