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68) 마한의 심장, 시종 마한 유적(下)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과 원통형 토기 /  마한 해양문화의 상징인 ‘남해신사’와 함께 독자적 마한왕국의 실체와 교류·융합의 마한 문화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는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과 고분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 모습.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과 원통형 토기 /  마한 해양문화의 상징인 ‘남해신사’와 함께 독자적 마한왕국의 실체와 교류·융합의 마한 문화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는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과 고분에서 출토된 원통형 토기 모습.

옥야리 고분서 첫 석실묘제 출현

1996년 촌로들 사이에 봉분이 일곱이 있다고 하여 ‘칠조산(七造山)’이라 불렀다고 하는 곳에 남아 있는 4개의 고분이 확인되면서 나주 복암리 일대가 크게 주목되었다. 이 가운데 3호분에서 옹관묘 22기, 수혈식 석곽묘 3기, 횡혈식 석실분 11기, 황구식 석곽묘 1기, 횡구식 석실묘 2기, 석곽옹관묘 1기, 목관묘 1기 등이 확인되었다. 목관묘-옹관묘-석곽 옹관묘-수혈식 석곽묘-횡구식 석곽묘-횡혈식 석곽묘 순으로 변천하는 묘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복암리 3호분 가운데 6세기 중엽 조성된 석실분에서 옹관 고분이 함께 확인되어 이 지역이 그때까지도 옹관 고분을 사용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들 지역은 옹관 고분 밀집 지역 외곽에 있어 옹관 고분 사회 전시기를 대표하는 중심 세력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3호분 96석실에서 출토된 옹관 경우도 성행기가 아닌 쇠퇴기 옹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미약한 옹관묘제의 전통은 새로이 유입된 석실분이 유입되어 독자적 묘제로 발전하는 여건을 마련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복암리 3호분에서 확인된 10여 기가 넘는 석실분의 존재는 이제 옹관과 함께 석실 고분 시대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영산강 유역에 횡혈식 석실이 도입되고 변천되는 과정까지도 알게 해주었다. 옹관과 목관 일색이던 영산강 유역에 석실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중엽 영산강 하류에 위치한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횡구식 석실에서부터였다. 

영산강 중류에 위치한 나주 가흥리 신흥고분에서 확인된 횡혈 계통의 석실분은 이보다 약간 시기가 늦게 조영되었는데, 옥야리 고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곧이어 가흥리 고분과 인접하며 영산강 연안에 위치한 잠애산 비탈에 조영된 복암리 정촌고분이 횡혈식 석실분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무렵 시종 자라봉 고분, 광주 쌍암동 고분, 복암리 건너 영동리 고분이 축조되었고, 반남의 신촌리 9호분은 수직으로 확장되면서 상층에 옹관이 매장되었다. 이처럼 시종 옥야리 고분에서 처음 모습을 보였던 석실분은 가흥리 고분, 정촌고분, 복암리 고분을 거치며 이 지역의 특질을 지닌 이른바 '영산강식 석실분'으로 자리매김해갔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식과 다른 '영산강식 석실분'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영산강 유역 석실분을 백제 석실분의 영향과 관련하여 살피기도 한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 석실 고분들이 내륙에서 남하하는 것이 아니라 영산강 하류에서 영산강 연안을 따라 북상하거나 인근 내륙으로 확산되고 있어 백제 석실 고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실제 백제식 석실은 산록에 위치하며 궁륭형 천장을 하고 장축 방향이 남북 방향을 띤 반면, 영산강 유역 석실은 동서 방향을 띠고 있으며, 평천장을 한 정촌 고분처럼 궁륭형 대신 평천정, 맞조임 천정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백제식과 같은 맞조임 천정 형식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벽석을 밖에서 눌러주는 보강석을 별도로 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현문(玄門)도 할석 만을 쌓아 연도를 밀폐하는 개구식(開口式)과 판석으로 입구를 우선 막고 연도에 추가적으로 할석 폐쇄를 하는 문틀식 현문으로 나누는데, 웅진기에는 개구식이, 사비기에는 문틀식이 유행한 백제와는 달리, 영산강 유역은 등장 단계에서부터 문틀식과 개구식이 병존하였고, 수적으로 문틀식이 보다 많았다. 개구식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영산강 유역에서 보이는 석실들은 백제와 관련성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영산강 유역에 석실분의 등장을 백제의 영향력 확대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이라 하겠다.

전체 길이가 6.8m나 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영산강 유역 횡혈식 석실분 가운데 가장 긴 정촌 1호분은 현문의 문비석에서 연도 천장석까지 한 단씩 상승하는 구조로 평천장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일본 구주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유일하게 정촌 고분 석실에서 바닥에 누워 있는 문비석이 발견되었는데, 문비석은 일본 구주 지역에서 보인다고 한다. 이렇듯 정촌 고분의 석실은 오히려 왜와의 관련성이 많이 보인다.

개방성과 다양성의 옥야리 고분

한편 정촌고분의 1호 석실이 축조된 이후 분구를 다시 파고 안치된 매장품 가운데 나온 개배는 전형적인 복암리식에 해당하지만, 그 이전 축조 당시 조성된 층에서는 스에키계와 오량동식 개배가 공존하고 있다. 같은 곳에서 나온 유공광구호도 오량동 출토품은 동체부에 원형 구멍이 뚫려 있는 형태로 구연부가 강조되지 않았으나 스에키 토기의 영향을 받으며 점차 동체부가 줄어들고 구연부가 강조되는 방향으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정촌고분에서 나온 목재의 재질을 시료 분석한 결과 '금송'이 확인되었는데, 한반도에서는 식생되지 않고 시코쿠 및 큐슈 등 일본 남부 지방에서 자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세기에 들어서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영산강 유역의 석실분들은 백제와의 관계보다는 왜와의 교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말하자면 당시 영산강 유역 정치 세력들은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왜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러한 묘제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토괴가 가야와 왜의 양식이 융합되어 나타난 새로운 형식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옹관 고분 일색에 새로운 석실분이 등장하는 모습이 이해된다. 이렇듯 영산 지중해의 입구에 위치한 시종은 다른 어느 마한 지역보다 그들의 고유문화를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석실분의 도입에서도 알 수 있다.

어느 지역보다 개방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문화 역량을 보인 시종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는 석실분 이전의 옹관 고분에서도 나타났을 것이라 여겨진다. 지난 호에 언급하였다시피 시종지역 출토 옹관 고분을 베트남·중국 등의 옹관과 비교 검토하는 연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이렇게 되면 동아시아 독무덤에서 차지하는 시종지역 옹관의 ‘보편성’과 ‘OUTSTANDING’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리라 믿는다. 

며칠 전 시종 지역 몇몇 인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필자가 언급한 ‘마한 밥상’이 화제가 되었다. 시종의 찬란한 역사 유산을 발굴하여 그것을 우리의 문화 전통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유인학 마한역사문화연구회장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는 바이지만, 마한 해양문화의 상징인 ‘남해신사’와 독자적 마한 왕국의 실체와 교류·융합의 마한 문화의 특성을 보여준 수많은 대형고분이 있는 시종의 역사적 위치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는 가야 지역에도 없는 이 지역만이 지닌 특성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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